여자가 되고 싶은 은찬이

하얗고 작은 얼굴. 어깨 위에서 찰랑거리는 결 좋은 생머리. 아담하고 동그란 어깨. 아마도 백건의 스트라이크 존이다. 은찬은 자신을 조용히 불러낸 같은 반 반장을 보면서 심드렁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한참을 귓가를 발갛게 물들인 채 우물쭈물하던 그 애가 드디어 결심이 선듯 은찬에게 앙증맞게 포장된 쿠키와 편지를 대뜸 내밀었다.

이거…!

내미는 선물을 은찬이가 스스럼없이 받아들었다. 백건한테 주면 되는거지? 잘생기고 인기 많은 친구를 둔 죄로 이미 몇 번이나 이런 부탁들을 받아본 경험이 있어 익숙했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던 모양이다. 반장은 은찬의 말에 잠깐 멈칫거리더니 곧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 아냐. 네가 받아주면 좋겠어. 은찬이는 그제야 얼어붙었다. 이런 일은 정말로 처음이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든 선물이 갑자기 묵직하게 느껴졌다.

좋아해, 좋아해 은찬아.

-

익숙하지 않아서 얼떨떨했지만 은찬은 결국 반장의 고백을 거절했다. 미안. 받을 수 없어. 좋아한다고 할 때부터 반은 울먹거리던 여자애는 그 말에 눈물을 뚝뚝 떨궜다. 소매로 얼굴읗 닦아내면서 반장이 물었었다. 왜, 왜 안돼 은찬아? 그때 뭐라고 둘러댔더라. 급하게 주워섬긴 변명들이 너무 구차해서 이젠 잘 기억도 안난다. 아마 반장도 그 무성의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대도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떻게 말하겠어.
널보면 질투가 난다고.

내가 만약 여자였더라면. 그 생각은 오랫동안 은찬이를 괴롭혀왔다. 남자의 몸이라 주술을 배우기 어려운 체질인 걸 알았을 때부터. 주술실력은 더 뛰어난대도 징표가 없어 후계자가 되지 못한 누나들이 보기 미안해질 때나 집안 어른들이 수련하는 모습을 보면서 뒤에서 작게 혀를 찰 때마다 드는 생각.

그리고 백건에게 설레는 얼굴로 고백하는 여자애들을 볼때도 어김없이 그런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짝사랑에 대해 친구와 시시덕거리고 발렌타인만 되면 손 끝을 더럽혀가면서 어설픈 초콜릿을 만들어서 어쩌면 운좋게 전해주며 고백하길 꿈꿔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들이 불쑥불쑥 치밀어 오른다. 내가 걔네보다 훨씬 더 오래, 훨씬 더 많이 좋아했단 말야.

아 진짜 무지 음습하다. 주은찬.

자괴감인지 비참함인지 속이 울렁거렸다. 은찬은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상 위에 엎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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