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우현오:죄책감과 교활함

손 끝에 방울로 맺혀 추락하는 생명의 흔적. 비린내나는 그것은 말초신경을 조금 간지럽히며 바닥에 떨어져 먼지와 뒤섞였다. 코는 이미 마비되어 공간에 가득찬 죽음의 냄새를 모른다. 횟수로는 처음이었지만 사실 현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남의 공포, 두려움, 증오에 대해 무감각해져 있었다. 다만 조금 피곤했다. 피로감을 느끼며 무심코 뒷목을 주물렀다가 목덜미에 남게 될 핏자국에 뒤늦게 생각이 미친다. 형님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텐데. 현우는 그날 밤 처음으로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미리 닦아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방문 밖에 현오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도 모를 누군가에게 뒤처리를 떠넘기고 문을 열자마자 현우는 그의 등돌린 모습과 마주쳤다. 흰 셔츠에 감싸인 등, 가라앉은 어깨. 문을 등진 채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던 그는 곧 현우의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안그래도 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현우는 이 방이 그다지 방음에 뛰어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는 전부 듣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현우는, 그가 자신을 혐오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상상만으로도 어딘가 깊숙이 베이는 것처럼 서늘한 기분이었지만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현우가 이 방으로 들어가는 걸 막고 싶어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현오는 남의 피로 더러워진 현우를 두려움과 혐오로 바라보는 대신, 핏자국이 말라붙은 손을 잡고 세게 끌어당겼다. 가자, 현우야. 현우는 당황했지만 곧 손을 잡아끄는 악력을 조용히 따라 걸었다. 어디로 데려가는 거냐며 백부가 한번쯤 길을 가로막고 물었지만 현오는 드물게 공격적인 태도로 제 아버지를 밀쳤다. 이만큼 했는데도, 아직도 현우를 이용할 일이 남았습니까? 이를 갈듯 씹어뱉는 날카로운 말. 죽일 것처럼 노려보는 눈빛. 위계에 뚜렷하고 예의가 깍듯한 현오답지 않은 모습에 질린 백부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다시 현오의 손에 붙들려가면서 현우는 자신이 선택한 차기 가주가 백부를 기백으로 짓누를 정도로 강한 것을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백부에게 향했던 그의 분노가 이제 자신에게 쏟아질 일들을 염려해야 할지 고민했다. 유일한 위안은 손을 꽉 잡고 놓지 않는 온기 뿐이었다.

현오는 현우를 제 방으로 데려갔다. 누가 뒤에 따라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현우를 먼저 들여보내고 등 뒤의 문을 닫아버린다. 닫힌 문에 위태하게 기대선 현오가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문을 따라 미끄러지는 것처럼 주저앉았다. 현오는 갑자기 무너진 그의 신형에 놀라 가까이 다가섰다. 형님, 몸이 좋지 않으십니까? 현오는 대답하는 대신 아직까지도 붙들고 있던 현우의 손을 가깝게 끌어당겼다. 현우는 차마 그걸 거절하거나 뿌리치지 못했지만 얼룩진 손과 검은 소매가 현오의 흰 셔츠에 가까워지자 안절부절하기 시작했다. 현오의 셔츠에 어울리지 않는 핏자국이 남을까봐 불안했다. 그러나 현오는 그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히려 소매로 현우의 손에 말라붙은 붉은 자국을 힘주어 닦기 시작했다. 현우는 깜짝 놀라 팔을 빼내려고 했다. 주먹으로 후려갈기느라 조금 부은 손등 위에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만 없었다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현오는 울고 있었다. 그 눈물에 현우는 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

현우아, 미안해. 내가. 너를. 여기까지 오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띄엄띄엄 끊기는 목소리. 손등을 적시고 말라붙은 피딱지를 녹여 섞이는 투명한 눈물. 이젠 얼룩덜룩해진 소매 끝으로 현우의 손을 몇번이나 문질러 닦는 떨리는 손길. 현오는 그러면서 끊임없이 미안하다는 말을 되뇌었다. 현우는 그걸 보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상했다. 현오는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없었다. 현우는 등에 현무를 지고 태어났을 때부터 이렇게 쓰일 운명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이용될 거라면 단 한명, 현우가 사랑하는 그를 위해서길 바랐던 이기심으로 차기 가주를 지명했던 것 역시 현우였다. 그는 너무 상냥해서 거절하거나 현우를 밀어내지 못했을 뿐이다. 차라리 타인을 원망하거나 미워했으면 좋았을 텐데 현오는 화살의 끝을 자기에게 돌리고 책임도 아닌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현우는 그에게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생각만 했다.

형님, 제게 미안한가요?

현오는 그 말에 처음으로 젖은 눈을 들고 어느새 반무릎을 꿇고서 시선을 맞춰오는 현우를 바라보았다. 현우는 스스로의 교활함에 경악하면서도 현오가 눈물로 닦아낸 손으로 이번엔 현오의 손을 꽉 잡아 품으로 끌어당겼다. 저항 없이 끌려온 얼굴이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지척이었다. 내뱉는 날숨이 뒤엉키는 거리에서 현우가 뱀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 제게 미안한 거라면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현오가 한번 눈을 깜빡이자, 눈가에 맺힌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현우는 그것이 방울져 턱 밑으로 떨어지기 전에 핥아 삼켰다.

제가 무슨 짓을 해도, 절 버리지 않겠다고.

현오는 뺨에 와닿는 혀끝을 느끼자 놀랐는지 숨을 급히 들이쉬었다. 그러면서도 차마 현우의 시선에서 도망치지는 못한다. 검끝에
궤뚫린 것처럼 파드득 떨리던 눈이 질끈 감기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현우는 그다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제 책임도 아닌 죄책감으로 발이 묶인 그가 한편으로는 처량하면서도 기뻤다. 영원히 그를 제 곁에 묶어둘 수만 있다면 그 수단은 사랑이든 집착이든, 동정이든 별로 상관없었다. 현우는 짙고 어두운 제 소유욕이 발톱을 드러내도록 내버려두면서 현오의 멱살을 쥐어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타인의 상냥을 빌미로 곁에 묶어둔 교활함과 닮지 않은, 서투르고 직설적인 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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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이라 떡 연성을 쓰고 싶었는데 서론이 너무 길어져서 망했다고 한다(mm)
떡씬은 아쉽지만 다음기회에..☆ 그래도 15화 후 새롭게 정립한 현우현오 캐해석으로 쓰고 싶었던 내용은 다 써서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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