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건은찬:가을비(2)

※가람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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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아, 아까는 미안해.

백건이 기억을 되찾은 그날 밤. 주은찬은 가람에게 와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조금 민망한지 뒷목을 매만지면서 늘 그렇듯 어설픈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로. 금찬으로 자길 우스꽝스럽게 만든 것에 대한 사과인가 싶었다. 처음에는. 가람은 설거지를 마치고 젖은 손을 수건에 대충 문질러 닦으면서 주은찬을 돌아보았다. 솔직히 별거 아닌 일이기도 했고  백건의 수준 낮은 도발에 걸려 넘어간 자신을 말리기 위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화도, 탓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사실은 이렇게 사과까지 하러 찾아온 게 오히려 의아할 뿐이었다.

그래서 가람은 주은찬이 그 일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을 꺼내면 별걸 다 신경쓴다며 면박이나 좀 주고 말 셈이었다. 냉장고에 등을 기대고 주방 근처에 어정쩡하게 선 주은찬을 돌아보며 시선으로 말을 재촉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가람의 시선을 받고 멋쩍은 듯 뺨을 긁적이면서 주은찬이 어렵게 꺼낸 말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게…. 백건도 나쁜 뜻으로 그런 건 아닐거야. 기억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쫓겨 선을 넘은 것 같아. 원래 말을 좀 재수없게 하긴 해도 나쁜 애는 아닌데. 혹시 백건 막말 때문에 기분 많이 상한 건 아닌가 해서.

그걸 왜 네가 사과해?

그런 어설픈 변명을 듣자고 기다렸던 게 아니었다. 기대와 전혀 다른 말에 가람의 대답 역시 준비했던 것과 상관없이 툭 튀어나갔다. 어색한 웃음과 함께 이어지던 말들이 그 반문에 딱 끊겼다. 정곡이었나 보다. 잠깐 할 말을 잃었던 주은찬은 아까보다 훨씬 자신없는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게. 내가 백건 뒤치닥거리에 너무 익숙해졌나.

그게 아니겠지. 제 입으로 말하는 주은찬도 제 변명을 믿지 않을 것이다. 가람은 사람에 대한 평가가 빠른 편이었다. 용족의 통찰력은 가볍지 않다. 인간은 인간을 제대로 볼 줄 모르는데 그들의 무리에서 한발 비껴난 가람만이 냉정한 시선으로 그들을 가늠했다. 그래서, 가람에겐 보였다. 주은찬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것. 아주 천천히 오랫동안 익어온 감정.

넌 그냥 네가 좋아하는 백건이 다른 사람에게 미움받는 게 싫은 거잖아. 가람은 그냥 그 말을 목구멍 안으로 삼켜버렸다. 왜일까. 어쩐지 심술이 나서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한번, 눈에 보이니까 모르는 척 하는 게 더 어려웠다. 현우야 원래 이런데는 멍청하고 둔해서 그렇다치는데 나머지 둘은 가만히 보고 있자니 답답해서 웃음도 안나왔다. 주은찬은 제대로 자각도 못한 주제에 쓸데없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백건은 자길 순수하게 친구로만 보는 줄로 착각하는 것이다. 아무리 사랑이 원래 맹목적이라지만 주은찬은 백건에 대해 좀 심각한 수준으로 둔했다. 평소엔 뭐든지 민감하게 잘 알아채면서 백건이 도저히 모를 수 없을 만큼 노골적으로 뚝뚝 흘리고 다니는 감정들은 눈치도 못챈다.

백건도 멍청한 건 똑같았다. 자기가 주은찬에게 얼마나 목매고 있는지 자각도 못하는 주제에동물적인 감만 발달해서 아무에게나 질투하며 이를 세우고 으르렁댔다. 종종 주은찬과 함께장을 보러가려는 가람에게 대련을 핑계삼아 덤벼들면서 귀찮게 구는 식의 유치한 방법으로. 그러면서 가람이 왜 갑자기 지랄이냐고 물으면 뻔뻔한 얼굴로 되도 않는 핑계만 주워섬긴다. 당연히 할말이 없겠지. 자기도 왜 그러는지 모를테니까.

둘이 쌍방으로 삽질하는 걸 보면서 가람은 사람이 답답해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게 됬다. 그렇다고 먼저 나서서 친절하게 사랑의 큐피드 역할이나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아니, 조금 더 솔직해져보면, 가람은 둘이 영영 서로의 감정을 모르기를 바랐다.

백건의 본능적인 감은 그나마 칭찬해줄만 했다. 사실 그가 아무에게나 으르렁대는건 아니다. 그는 가람이 주은찬에게 보내는 시선을 알아챈 것이다. 정작 주은찬의 눈은 보지 못하면서. 가람은 자기가 가망 없다는 걸 알았지만 재수없는 백건을 도와주고 싶진 않았다. 둘이 얼마나 쓸데없는 걱정으로 속을 태우든 말든 알게 뭔가. 자신한테는 처음부터 기회조차 없었는데.

주은찬, 너 백건 좋아하지.

그렇게 생각했으면서 결국 이렇게 오지랖을 떠는 이유는 간단하다. 오전 수련이 끝나고 점심 때까지 잠깐 붕 뜬 시간동안 뒤뜰에서 혼자 눈물을 떨구던 주은찬을 어쩌다 보게 된 것이다. 가람은 자신이 생각보다 더 주은찬에게 무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소리도 내지 않고 붉어진 눈으로 눈물만 뚝뚝 흘리는데 그걸 보고도 모른체 할 수가 없었다. 운 이유는 아직도 모른다. 아무리 애써도 늘지 않는 주술 능력 때문에 초조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백건의 마음을 잘못 오해해서 그럴 수도 있고. 이도저도 아니면 집안에 뭐 안좋은 일이 있든지 어디서 나쁜 소릴 들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가람은 이 방법 외에 주은찬을 달래는 법을 생각할 수 없었다.

백건은 뻔뻔하게 주은찬과의 거리를 좁히고 다가가 눈물을 닦아줄 것이다.
겁쟁이인 자신은 절대 못하겠지만.

그래서 가람은 멀쩡한 얼굴을 가장하고 점심을 꾸역꾸역 삼키던 주은찬을 장보기를 핑계로 끌고 나왔다. 별로 급하지도 않았던 식재료를 대충 주워담고 계산하려고 꺼낸 백건의 카드가 꼴보기 싫어서 일부러 제 주머니를 털었다. 성의없는 쇼핑이었기 때문에 짐은 봉투 한개 분량밖에 안됐다. 가람은 그걸 주은찬이 들기 전에 먼저 낚아채고 앞서 걸었다. 마트의 차양 밑. 거기서 가람은 맑기만 한 하늘을 슬쩍 올려보다가 주은찬에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물었다. 너 백건 좋아하냐고. 대뜸,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주은찬이 숨기고 싶어했던 속내를 멋대로 까뒤집으면서.

주은찬은 그 날처럼 잠시 말을 잃었다가 혀밑으로 몇번 단어를 고르기도 했다가 결국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먹구름처럼 흐린 얼굴로 웃는 채였다. 응, 좋아해. 나 혼자. 기가 찬다.

주은찬, 나랑 내기할까?

가람은 여의주를 꺼냈다. 여의주가 손 안에서 한번 빙글 돌자 맑기만 했던 하늘에 삽시간에 주은찬 표정처럼 흐린 구름이 몰려든다.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기까지 채 오분이 안 걸렸다. 가람은 소나기를 등지고 주은찬을 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가람은 웃고 싶어졌다가 동시에 좀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두 선택지 모두 버리고 가람은 담담하게 말했다.

백건한테 전화해. 비오니까 데리러 오라고.

너는 잘 모르겠지만, 백건 존나 게을러서 이런거 절대 안나와. 알아? 그런데 니가 전화하면 그 자식 맨발로도 나올걸. 그래도 전혀 모르겠으면 내기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백건이랑 돌아가면서 그냥, 그냥 물어보란 말야. 젠장. 사람 답답하게. 가람은 속에 오래 감춰둔 걸 전부 다 쏟아내듯 두서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러다 결국 거칠게 제 머리를 헝크러트리고 주은찬에게 거의 소리지르듯 말했다. 아씨, 몰라! 너 알아서 해. 난 먼저 갈테니까. 

여의주는 모양을 맘대로 바꾼다. 가람은 그걸 우산으로 바꿨다. 그 우산을 혼자 쓰고 한손에 짐을 들고 재빠른 걸음으로 마트 차양을 벗어났다. 빈손으로 우두커니 주은찬을 남겨둔 채. 거의 뛰는 것 같던 걸음이 조금씩 느려지고 결국 멈췄을 때, 가람은 뒤를 돌아보았다. 은찬이 핸드폰을 붙잡고 멀리 찻집 방향을 내다보는 중이었다.

가람은 그제야 자기가 우산을 너무 크게 만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차피 같이 쓸 것도 아니었는데.

-

헤헤 드디어 뎅 리퀘였던 자기들만 모르게 썸타는 건찬 끝냈다:3 넬 노래 배경으로 깔고 쓰기 시작하니까 가람이 감정이 너무 깊어져 당황스럽다. 가볍게 쓰려던 건찬에 가볍게 가람찬을 끼얹을 셈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주객전도된 느낌ㅋㅋ 뎅이 너무 당황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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