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건은찬:가을비(1)

일보는 바위처럼 체중으로 눌러 딛고 이를 중심축으로 삼아 몸을 회전시킨다. 그 다음 발은 조금 늦게 몸을 따라 돌아가며 허공을 내려찍었다.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이 제법 매서웠다. 척추를 곧게 세워 중심을 바르게 하고 왼손은 당겨 단전 근처에 바로 둔다. 흔들리지 않도록 몸을 고정시키고 오른손을 빠르게 내질렀다. 상대의 명치를 거세게 끊어 후려치고 다시 모아 호흡을 정돈하고. 현우는 제가 배운 내용을 되뇌이며 수련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청룡공자는 사신이 되지 않겠다고 공언하며 수련을 내팽개친지 오래고 백호공자는 기억을 되찾으면서 대가로 호승심을 잃어버리기라도 했는지 요즘은 게으르기 짝이 없다. 유난히도 문제가 많은 이번 사신 후계자 중에서 그나마 성실하게 수련에 정진하는 건 자기 뿐이었다. 

현우가 내심 혀를 차고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기고 있을 때였다. 하늘을 향해 높게 내질렀던발등 위로 찬 기운이 똑 떨어진다. 현우는 그제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머리 위에는 먹구름이 가득 끼어 있었고 한두 방울씩 빗방울이 맺혀 떨어지는 중이었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이마 위에 한 방울 더 비를 맞고나서야 현우는 훌쩍 매화장에서 뛰어내려 마루 위로 올라갔다. 가을비 정도는 그냥 맞아도 감기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단련된 몸이었지만 행여 옷이라도 젖었다가는 꼼짝 없이 듣게 될  청룡공자의 잔소리는 좀 무서웠다.

마루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노트북 화면만 줄창 들여다보던 백호공자가 부산하게 마루 위로 올라서는 기척에 그제야 현우를 돌아보았다. 뭐야, 비오냐? 보면 모릅니까? 청룡공자와 주작공자가 장보러 나갈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게으른 모습에 질려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고 말이 불퉁하게 나왔다. 재력이라도 없었으면 엉덩이라도 뻥 걷어차서 일 시켰을 텐데. 돈 좀 풀었다는 이유로 상전처럼 굴고 있으니 얄밉지 않을 수가 없다.

현우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지 백호공자는 현우의 어깨 너머로 점점 굵어지기 시작한 빗줄기를 흘끔 보더니 하루 종일 게으르게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걔네들, 우산 갖고 나갔던가? 장보러나간 주작공자와 청룡공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현우는 잠깐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백호공자의 금색 카드만 주머니에 딸랑 넣어가지 않았었나? 

뭐, 청룡공자야 여의주가 우산으로도 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실없이 던진 농담인데 말하고보니 스스로 생각해도 제법 그럴싸했다. 아니면 하늘의 힘을 빌려쓸 수 있으니 정 불편하면 직접 비를 그치게 하고 돌아오면 그만이었다. 와, 생각할수록 여의주 진짜 불공평하다.

백호공자는 물어봐놓고 현우의 대답을 별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대신 하루 온종일 들여다보던 노트북에는 이제 관심이 식었는지 한쪽에 던져뒀던 핸드폰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마치 무슨 연락이라도 온 것처럼. 하지만 현우도 이제 대충은 안다. 전화든 문자든, 그 뭐였더라, 카톡이든. 기별이 왔다면 저것이 진동을 하든지 시끄러운 소리를 내 스스로 알렸을 것이다.

부르르.

그래, 바로 저렇게…. 응? 백호공자는 화면에 뜬 이름을 흘끗 보더니 기다렸던 것처럼 전화를 받아들었다. 뭐야, 주은찬. 왜? 말투는 퉁명스러운데 백호공자는 보람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배부르고 만족스러운 낯짝이었다. 우산? 청룡은 어쩌고. 아침에 일기예보도 안봤냐. 아무튼 주은찬 덜렁대는 건 알아줘야 돼. 아, 지금 바쁜데. 진짜 귀찮게…. 내가 마중나가주면 뭐해줄건데? 설거지 세번? 그걸로 될 것 같냐. 말은 그렇게 쏘아붙이는 주제에 백호공자는 전화 너머로 주작공자의 말이 들려왔을 때부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입으로는 귀찮다. 바쁘다. 걍 알아서 오지? 등등 다채롭게 구박하면서도 전화기를 어깨와 머리 사이에 끼우고 섬돌로 나와 신발을 꺼내 신는다. 현우는 무슨 희극을 보는 양 우스꽝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지금 마루 밑에서 우산을 꺼내 먼지를 털고 기꺼이 주작공자 마중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 저게 내가 알고있는 백호공자가 맞나. 무슨 사악한 사술에라도 걸린게 아닌가.  현우가 멍때리든 말든, 백호공자는 착실하게 말과 행동을 달리 하고 있었다. 화룡점정은 낡은 우산 두 개를 손에 들고 가늠하더니 하나를 던져버리고 전화 너머로 지껄인 말이었다. 야, 어쩌냐. 우산이 하나 밖에 없네. 약파는 것도 이정도면 수준급이었다.

암튼 거기서 얌전히 기다려라, 주은찬.

백호공자는 전화를 뚝 끊고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결국 우산 하나만 펼쳐들고 나가버렸다. 평소처럼 건방지고 쓸데없이 당당한 걸음이 아니라, 좀 경망스럽게 폴짝폴짝 뛰는 것 같은 걸음으로. 현우는 백호공자가 사라진 앞뜰을 멍하니 보다가 제 눈을 비볐다.

방금 내가 뭘 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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뎅이 리퀘했던 본인들만 자각못하는 대놓고 썸타는 건찬 1편..
두 사람 시점 말고 다른 사람이 볼 때 얼마나 커퀴 냄새 풍기는지 써보고 싶었습니다(..)

담에는 가람이 시점에서 본 글이 될 것 같네요! ㅋㅋ
하나짜리 글 리퀘를 2개로 나뉘어서 달성표에 채우는 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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