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붙이는 얼음

아버지, 저는 이 사람의 이름을 압니다.

그의 이름은 …


-


언제 봐도 감동적인 결말이다. 뒷맛 깔끔한 해피엔딩이 불분명하고 모호한 열린 결말보다 낫다는 것이 늘 자신의 지론이었다. 아끼지 않고 후한 박수를 남긴 후에야 조용한 곁을 돌아본다. 재밌었지? 대답 대신 멀뚱하고 모호한 표정이 돌아왔다. 익히 예상한 바라 히죽 웃으며 몸을 일으킨다. 나갑시다. 순순히 일어서는 어깨를 가볍게 감싸 끌어당긴다. 밤 공기가 제법 찼지만, 이만한 추위에 움츠러 들 것 같았음 애초에 그녀에게 데이트 가잔 소리도 못했지. 칼라프는 불을 붙이는 얼음을 투란도트라고 불렀지만 거기에 살로메를 대신 넣어도 말은 됐을 것이다. 밤 거리를 나란히 가로지르며 묵묵히 정면을 보고 있는 창백한 얼굴. 그 피부 위에선 늘 가벼운 한기를 느껴진다. 뺨에 내리박히는 눈길을 알아챘는지 이유를 묻는 것 같은 시퍼런 시선이 돌아온다.


이번엔 안 잤네. 그래서 어땠어? 처음으로 끝까지 본 감상은.

그냥, 그랬는데. 왜, 재밌는지는 여전히 모르겠고.


단조로운 모노톤의 대답과 함께 정면으로 돌아가는 시선. 느린 손길로 코트깃을 다시 세운다. 이 역시 익히 예상한 반응이라, 멋쩍어하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에 또각거리는 구두소리에 보조를 맞춰 걸으면서 기억을 더듬는다. 내 첫 관람은 오늘이 아니었다. 


나는, 이걸 처음 봤던 게 … 언제였더라. 이십대 때였나. 


말문을 떼자 조금 느려지는 걸음. 귀기울이는 것이다. 자잘한 신호에 제멋대로 주석을 매달아가면서 나는 회상을 계속했다. 이십대, 동행이 있었던 건 기억나는데 얼굴이 흐릿하다. 아마도 그 당시 공들이던 여자였겠거니. 불필요한 곁가지는 적당히 쳐낸다. 어차피 꺼내려던 건 그때의 감상 뿐이다. 


그땐 생각했거든. 재밌긴 한데, 사랑이든 의리든 감정에 목숨 거는 거, 그거는 영영 이해 못하겠다.


살아있어야, 뭐라도 하는 것이다. 명예건 의리건 정이건 연애감정이건 모두 그 다음에 온다. 이 생각은 한번도 변한 적이 없다. 없었다. 그 즈음에서 걸음을 당겨 세우고 완전히 그녀를 향해 돌아선다.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시선을 모른 척, 가벼운 한기가 도는 창백한 뺨 위를 손바닥으로 감싸고 엄지로 느리게 눈가 아래를 쓸었다.


그런데, 사람이 변하더라고. 


불을 붙이는 얼음, 얼마나 정확한 표현인지. 뺨을 문지르는 손끝, 반대쪽 어깨를 가볍게 쥔 손바닥, 가깝게 닿은 하체, 그리고 진하게 발린 립스틱을 번지게 만드는 입술까지 화끈거리지 않는 곳이 없다. 아무도 눈을 감지 않은 키스 끝에 가만히 그 새파랗게 타오르는 시선을 마주하면서 못박는다. 


목을 벨 거라면, 내일 아침에 해.


어깨를 감싼 손이 느리게 미끄러져 팔을 타고 내려와 손목에 이른다. 엄지로 느린 맥박이 뛰는 손목 안쪽을 천천히 문지르면서 나는 주석을 매달 또 다른 신호를 기다렸다. 이를테면, 조금 빨라지는 두근거림같은. 


나는 밤 동안 당신이 녹기를 기대할 테니까.


-


그의 이름은 사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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