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건은찬:유과

시위 당직을 다음 순번과 교대한 건은 강녕전에서 빠져나와 곧바로 돌아가는 대신에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벽 별빛만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사위는 온통 어둠과 조용한 침묵 뿐이다. 건처럼 당직을 서고 있는 내금위사외엔 죄다 잠들어있을 것처럼. 하지만 건은 아직도 깨어있을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조금 피곤이 스며드는 뒷목을 주무르며 건은 여러번 오갔던 내궐을 익숙하게 가로질렀다. 고개를 가볍게 흔들자 찬 밤바람이 뺨을 스쳐 잠기운을 떨치기에 좋았다. 휘적휘적 걷는 걸음에는 거침이 없다. 그만큼 자주 향했던 길이다. 눈에 익은 전각 몇 개를 지나쳐가다 보면, 어둠에 쌓인 금궁 내에 유일하게 아직까지도 지창紙窓 밖으로 불빛이 새어나오는 곳, 집현전이 있었다.

정통
正統 6년. 무슨 일로 그렇게 바쁜지 집현전의 불은 항시 꺼질 줄을 몰랐다. 주상께서도 종종 새벽에 거둥하시고 제학들마저 집현전에서 잠들기 일쑤다보니 그 밑의 교리며 박사가 감히 퇴궐을 꿈꿀 수 있을리 만무했다. 그냥 집현전을 제 집으로 여기는 수 밖에. 건과 오래 함께 자란 동무인 주은찬 역시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건은 머뭇거림없이 전각의 귀퉁이를 끼고 왼편으로 휙 돌았다. 하나, 둘, 세번째 창. 환기를 위한 것인지 살짝 열린 틈과 거길 비집고 나오는 불빛. 매일 보는 똑같은 광경이지만, 건은 또 한번 혀를 차게 된다. 어릴 적부터 체력도 부족해서 여름에도 툭하면 고뿔을 달고 살았던 주제에 조심성이 없다. 벌써 계절은 가을로 저물고 있었고 새벽 바람은 차갑기 그지없는데 꼭 이렇게 창을 열어두는 주은찬의 습관은 사라지질 않았다. 찬 공기라도 쐬야 잠을 떨칠 수 있다 항변할 모습이 뻔했지만, 이렇게 창을 열어놓고도 수마를 못이겨 잠든 적이 많다는 것을 건은 알고 있다. 아마 지금도 탁상에 엎드려 꾸벅꾸벅 졸고 있겠지. 제 뺨을 찰싹찰싹 때려가면서까지 잠을 쫒고 붓을 바로 세우고자 애썼겠지만 효과도 없게 필적이 곧 멈추고 쓰던 자리엔 먹물이 검게 번져있을 광경이 훤했다.

건은 허리춤에 찬 검병을 쥐어 당겼다. 백은 장식이 손짓에 따라 허공에서 흔들댔다. 검병의 끝으로 건은 열려있는 바로 아래쪽 벽을 가볍게 쳤다. 가볍게라고 해도, 창 너머 벽에 딱 붙어 있는 은찬의 탁상을 진동시키기엔 충분할 것이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너무 눈에 띄고, 새벽녘에 나인을 일러 몰래 불러오게 하는 것도 민망한 일이다. 정작 주은찬은 건이 이런 방식으로 자기를 깨울 때마다 골이 다 울린다며 진절머리를 쳤지만, 그럼 다른 좋은 방법 있냐는 물음에는 언제나 꿀먹은 듯 벙어리가 되곤 했다.

반응이 없기에 한 대여섯번 연달아 벽을 쳤더니 드디어 투덜대는 소리와 함께 걸상을 밀고 일어나는 소리가 창 너머로 들려왔다. 건은 그제야 피식 웃으며 벽을 두들기던 기행을 멈추고 검병을 손에서 놓았다. 빈 손으로 철릭의 옷자락 속을 파고들어가 품에 넣어둔 작은 주머니를 꺼낸다. 손 안에 한 줌. 흰 천으로 싸서 대강 묶은 그것을 위로 던졌다 받으며 손장난이나 치고 있다보면 불퉁한 얼굴에 덕지덕지 졸음기를 매단 채로 주은찬이 걸어나왔다. 관은 흐트러지고 소매는 구겨지고, 체신머리 없이 입까지 쩍 벌려 하품을 하는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뭐야, 왜 부른 거야? 졸린 눈을 비비며 투덜거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애다. 저런 걸 누가 집현전 수찬이라고 생각할까. 건은 혀를 가볍게 차며 그 때까지 허공으로 던지고 놀던 주머니를 휙 은찬에게 던졌다. 못난 얼굴에나 맞으라고 던진 거였는데 졸려 죽을 것 같은 기색이면서도 반사적으로 던져진 주머니를 받아낸다.

이건 뭐야?
열어봐.

주은찬은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 흰 천을 끌렀다. 매듭이 풀리고 천에 쌓여있던 한 줌의 유과가 드러나자 이내 잠이 싹 달아난 얼굴로 환하게 웃는다. 와, 이거 황씨 아주머니 유과 맞지? 나 진짜 먹고 싶었던 건데. 신기하다. 건아, 어떻게 알았어? 건은 대답대신 가볍게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어떻게 알았기는. 일전에 건은 무슨 변덕이신지 늦은 밤, 집현전으로 거둥하시는 주상을 보필해 함께 따라갔다가, 구석에 엎드려 잠든 채로 중얼거리던 주은찬의 잠꼬대를 용케 들었다. 유과, 유과 먹고 싶은데. 아주머니, 유과해주세요…. 주상께서는 대제학의 어깨 위에 친히 용포를 둘러주시느라 다행히 듣지 못하신 것 같았지만 그 순간 건은 낯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누가 보면 배 곯고 다니는 줄 알겠네. 집현전에 앉아있으면 알아서 수랏간 나인들이 때맞춰 식사 내오고, 주전부리 내오고 할 터인데 유세는.

그렇게 생각했으면서도 어쩐지 자꾸 그 잠꼬대가 계속 귀에 선했다. 결국 건은 퇴청하자마자 집의 찬모를 닥달해 유과를 만들게 시켰다. 금궁을 지키는 자리다보니 잠깐 집현전 들를 짬도 내기 어려워 불침번이 끝난 이 늦은 시각에도 퇴청하지 못하고 예까지 찾아왔다. 주은찬은 천하의 백건이 이렇게 마음쓰고 수고한 사실을 짐작이나 할까. 하루 종일 유과 꾸러미를 우겨 넣고 다녔던 가슴 언저리에 그런 생각이 불편하게 얹혀있었다. 그러나 보자마자 반색하면서 체신도 없이 맨손으로 집어먹는 모습이나, 눈이 마주치자 고맙다며 씩 웃는 미소에 어쩐지 체증이 내려가듯 건의 기분이 가벼워졌다. 뭐, 이렇게 좋아하는데 무슨 상관이겠어.

요즘도 여전히 바쁘냐?

유과를 순식간에 게눈감추듯 삼킨 은찬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퇴청해본 게 벌써 삼일 전이야. 이제는 좀 돌아가서 쉬고 싶은데 일이 한창이라. 건은 한숨과 함께 흘러나오는 한탄에 슬쩍 달빛에 의지해 은찬을 뜯어보았다. 눈 밑에 짙어진 그림자나 푸석한 얼굴을 보니 마냥 엄살은 아닌 모양이었다. 건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못난 얼굴이 더 못생겨져서 어떡하냐. 자각도 못한 채로 새어나온 건의 중얼거림에 은찬이 이를 꽉 깨물며 웃었다. 덕담 아주 고맙네. 그 발끈하는 반응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건은 자못 심각한 한숨 한번을 더 내쉬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체 무슨 대업이라고 이렇게 학사들을 쥐어짜는 거야? 전하도 정말 너무하시….

건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하고 동강났다. 주은찬이 기겁하여 손으로 백건의 입을 아예 틀어막은 것이다. 백 호군 나리, 지금 아주 미치셨습니까? 애군愛君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집현전 바로 뒤뜰에서 나랏님 투정이라니, 참 겁도 없어. 제학들께서 들으시면 경은 죽은 목숨이에요. 예? 잔소리할 때만 호군 나리 타령에 경어를 쓴다. 싫어하는 걸 다 알고 하는 짓이다.

무가武家로 이름난 백씨문의 종손으로 태어나서 열 여섯에 무과에 장원급제한 뒤로 건의 관직은 빠르게 올랐다. 사정
司正에서 사직司直까지도 얼마 걸리지 않았는데 최근엔 젊은 나이에 호군까지 달았을 정도다. 건에 비하면 은찬의 급제는 늦된 편이었다. 게다가 무반에서 알아주는 명문가인 백문과 달리 주문朱門은 청렴하고 권력에서 멀어서 가문의 위세를 등에 업기에도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둘 사이에 품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건은 그게 정말 몹시 싫었다. 건은 주은찬의 문장을 알았다. 글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눈으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은찬의 문장은 보다 더 귀히 여겨져야 했다. 그럴만한 가치가 거기엔 있었다.

하지만 건과 달리 주은찬은 도리어 직급으로 부르며 경칭하는 것을 즐겼다. 눈에 띄게 불퉁해지는 건의 반응이 재밌다는 식이다.
이게 아주, 남의 속도 모르고.

주은찬은 여전히 애군의 마음가짐과 신하된 도리에 대한 군소리들을 늘어놓고 있었고, 그걸 여전히 입이 막힌 채로 듣고 있었던 건은 불쑥 심술이 치밀었다. 혀를 내밀어 유과 가루를 덕지덕지 묻힌 채 입을 틀어막고 있던 얄팍한 손가락을 슥 핥은 것은 그런 속셈이었다. 얄밉상스러운 주은찬이 기겁하는 꼴이라도 보고 실컷 비웃으려고. 예상대로 놀란 주은찬이 불에 덴 것처럼 화드득 손을 뺐다. 방금 전까지 잘난듯이 주절대던 입은 딴 입이었는지 어버버 채 말도 못잇는다. 귀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맘에 들었다. 건은 배부른 낯짝으로 만족스럽게 씩 웃었다.

맛있네, 유과.

입에 남은 뒷맛이 몹시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