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건은찬:어쩌면 좋지

자다가 눈을 떴어

방안에 온통 네 생각만 떠다녀

생각을 내보내려고 창문을 열었어

 

그런데

창문 밖에 있던 네 생각들이

오히려 밀고 들어오는거야

 

어쩌면 좋지

 

어쩌면 좋지 / 윤보영


은찬은 눈을 깜빡였다. 익숙하고 평범한 천장이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만 보였다. 무슨 꿈을 꾼 것 같았는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어렸을 적 기억이 아닐까, 멍한 머리로 은찬은 추측했다. 한번 더, 눈을 깜빡이자 눈꼬리를 적시며 굴러떨어지는 한 방울의 습기가 축축하게 느껴졌다. 자면서 울기라도 했나. 청승맞다. 은찬은 젖은 제 눈두덩을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불도 켜지 않은 채로 베개 밑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홈버튼을 누르자 액정에 불이 들어오며 시간이 뜬다. 새벽 네시 십 삼분. 다시 잠들기에도, 그렇다고 아주 일어기에도 어정쩡한 시간이다. 은찬은 도로 핸드폰을 침대 맡에 내던졌다. 푹신한 이불 위로 던지려던 것이 엇나가 핸드폰은 헤드에 쾅 부딪혔다. 은찬은 남은 약정기간을 생각하며 비명을 지르는 대신, 다른 것에 시선을 빼앗겼다. 침대 헤드 위에 올려져 있다가 충격에 매트리스 위로 떨어진 작은 인형. 그 자리에 십년을 놓여있었던 것이다.


은찬은 무심코 그 인형에 손을 뻗어 주워들었다. 처음엔 눈처럼 새하얗기만 했던 털은 세월의 손때가 묻어 잿빛이 되었다. 선명하게 도드라지던 검은 줄무늬 역시 빛이 바랬다. 그러나 배인 기억 만큼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은찬은 이 작은 백호 인형이 어쩌다 제 방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지 여전히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어느 방학인가 은찬이가 올라가는 대신 건이가 직접 대전까지 내려온 적이 있었다. 무척 들떠서 백건의 손을 잡은 채 시내를 이곳저곳 쏘다녔었지. 그러다 앵그리버드 인형이 잔뜩 쌓여있는 인형뽑기 기계 앞에서 걸음이 멈췄었다. 건은 빨간 새가 은찬을 닮았다며 놀려대는 걸 잊지 않으면서 동전을 죄다 털어넣어 그 인형을 뽑았다. 어디다 쓰려고 그렇게 기를 써 뽑으려는 거냐고 물었더니 자주 못보니까 은찬을 닮은 못생긴 인형이라도 괴롭혀야하지 않겠냐는 투덜거림이 돌아왔다. 그리더니 그 옆에 있던 팬시샵에서 엇비슷한 크기의 백호 인형을 용케 찾아 은찬의 품에 덥석 안겼던 것이다. 야, 주은찬. 너도 이거 가져가서 나 보고 싶을 때 봐.

보고 싶었다. 기억과 함께 폭우처럼 쏟아지는 감정의 무게에 호흡까지 버거웠다. 은찬은 자기가 어느새 인형을 너무 꽉 끌어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등의 힘줄이 불거질 만큼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흡사 구명줄을 붙드는 것처럼 간절한 손길이었다. 은찬은 인형을 끌어안은 채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 좁고 작은 방 안 어디에도 품 안의 백호 인형같은 것이 널려있었다. 간신히 스물이 된 인생 중 반을 함께 보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백호의 수련실에서 함께 찍은 사진들, 생일날 받았던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편지, 함께 몰두했던 오래된 게임팩, 자긴 이제 필요 없으니 너나 쓰라고 두고 간 안경 보패. 하나같이 백건을 떠올리게 하는 흔적들이 방 안에 가득했다. 백건이 얼마나 제게 깊숙히 뿌리내리고 있었는지, 또 그래서 그 빈자리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지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은찬은 그 모든 것들이 향기처럼 내뿜는 그리움에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척대는 걸음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선 것은 그래서였다. 숨 막히는 공기를 환기하면 이 그리움도 전부 떠내려갈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걸려있던 걸쇠를 풀고 단숨에 끝까지 창을 열어젖혔다. 방충망도 달리지 않은 창문을 열자, 검푸른 하늘이 시야에 가득 찼다. 새벽이라 저물고 있었는지, 서쪽 하늘에 걸린 창백한 달이 유난히 낮고 또렷했다. 백호는 서방신수이니, 네가 있는 하늘도 어쩌면 저 근처일까. 창문을 열자 왈칵 방 안으로 쏟아진 달빛을 온 몸으로 맞으면서 은찬은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렇게 연상하고 나니 서쪽에 뜬 달이 마치 백건의 눈동자인 것만 같기도 했다. 은찬이 이렇게 창문을 열어 하늘에서 그를 찾는 것처럼, 어쩌면 백건도 달 너머에서 땅을 내려다보며 자신을 찾고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

그 상상이 너무 비참하고 달콤해서 은찬은 제 얼굴을 양 손으로 감싸 가렸다. 방안에서 은찬의 호흡까지 틀어막던 그리움은 창을 열어두어도 흘러나가는 법 없이 오히려 더 꾸역꾸역 밀려들어오기만 했다. 그리워서,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건아, 정말 어쩌면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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