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건은찬:지난 여름에 대하여

의지를 불태우기엔 순탄하게 잘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서요.¹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다.



재앙에는 전조가 없다. 그 날 역시 다른 날과 비슷하게 시작되어 비슷하게 끝날 줄로만 알았다. 수련을 위해 일찍부터 깨어 씻고 매화장으로 나오면 늘 그렇듯 가장 먼저 준비를 마친 현우가 있었고, 멀리서는 백건이 늦잠자는 가람이를 깨운다며 걷어찼다가 티격태격 싸우는 소리도 들렸다. 이를 마저 닦으며 올려다 본 하늘은 맑았고 공기는 여름인데도 아직 아침이라 서늘한 편이었다. 매화장 위에 올라서서 호흡을 가다듬으면 유독 상쾌하게 느껴지는 하늘의 기운이 기관지를 거쳐 단전까지 순탄히 흘러내려가는 것이 느껴졌고, 오랜만에 백건과 벌인 박투에서도 결국 이기진 못했지만 평소보다 많이 유효타를 먹여 백건의 기세를 주춤하게 만들 수 있었다. 어디에서도, 어제와 다른 오늘이 될 거라는 예감을 발견할 수 없었던 하루였다.

주작비술은 결국 주술계통이다. 백건이나 현우와의 무술 수련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둘과 몇 번 손을 섞고나면 은찬은 한 켠으로 비켜서 혼자 주술 수련을 이어가곤 했다. 하늘의 기운과 태양볕을 쬐어 몸 안에 고인 양을 주술로 돌리는 수련은 누가 도와줄 수도 없었다. 눈을 가린 채 어둠을 더듬어 한걸음씩 떼는 장님같은 기분으로 은찬은 제 몸에 휘도는 기운들에 집중했다. 양의 주술인 주작비술과 조화를 이루기 어려운 남자의 몸을 타고 난 죄로 은찬은 끊임없이 남들보다 늘 두배 이상 간절하게 발버둥치며 살아왔다. 그럼에도 뒤따라오는 성장은 실망스러울 만큼 더뎠다. 주작가문 내 다른 또래 여자애들이 석 달 걸려 익히는 삼매진화의 불꽃을, 은찬은 오 년을 들여 겨우 피워낼 수 있을 정도였다. 주작후계자의 증표인 붉은 머리는 타고 났지만 그 뿐이다. 그것외에는 후계에 걸맞는 재능도 운도 잘 따라주질 않았다.

그래도, 은찬은 낙담하지 않았다. 오 년이 걸렸어도 결국 손 끝에서 주작의 불꽃은 피어났고, 보패로 얻은 주술 금찬도 있었다. 중앙이 하늘의 기운을 받기에 좋은 장소라더니 그 덕인지 얼마전에는 수련 중에 새로운 주술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하기도 했다. 초조해지려는 스스로를 은찬은 그런 단서들로 매일처럼 다잡았다. 

괜찮아, 잘 될 거야. 느려도 분명하게 주술은 발전하고 있었고 서른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아있다. 나머지 셋이 먼저 사신문을 열고 혼자 뒤에 남겨져 수련할 생각을 하면 조금 쓸쓸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늦더라도 다시 만나면 되니까. 마지막으로 주작문을 열면 퉁명스럽게 왜 이렇게 늦었냐며 타박하면서도 다들 반겨주겠지. 아무리 수련이 막혀 막막해지고 늘지 않는 실력에 조급해질 때에도, 은찬은 마지막 확신만큼은 버려본 적이 없었다.

자신은 결국 주작이 될 것이다. 그건 평생을 은찬을 따라온 인생의 목적이었고, 벗어날 길조차 없어보이는 분명한 운명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믿었다. 그 날 까지는.

그 날도, 은찬은 행여 집기라도 부술까 하는 염려로 매화장 가장 구석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얼마 전 수련 도중에 깨닫게 된 새 주술에 대한 실마리 때문에 요 며칠 계속 들뜬 마음을 가누기 어려웠다. 처음 성공한 뒤로 3년 동안 은찬의 삼매진화를 조절하는 능력은 놀라울만큼 섬세하고 정교해졌지만 다른 주술을 더 습득하진 못했었다. 보패인 금찬을 빼면 쓸 수 있는 주술이 단 하나. 어디 가서 주작 후계자는 커녕 주작가의 주술사라고 명함을 내밀기도 민망해지는 수준이다. 그래서 은찬은 십수 년을 달달 외워왔어도 보이지 않았던 주작비급의 실마리가 그만큼 더 간절하고 반가웠다. 아직은 코끼리 다리나 만지고 있는 것처럼 막연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지만 방향성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나는 것이다.

괜시리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한 마음을 다잡으며 은찬은 호흡과 마음을 정돈했다. 눈이 감기고, 이마 위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 흔들거리고. 숨을 타고 몸 속으로 흘러온 하늘나라의 기운이 한바퀴 기혈을 따라 몸 안을 돈다. 주작의 비술은 돋아오르는 양의 기운으로 발현하고, 그 가운데서 은찬은 주술을 담는 그릇이 되었다. 음양오행의 이치에 맞게 여자의 몸이였다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아랫배의 단전으로 모였을 기운들이, 은찬의 몸 안에서는 범람하는 강물처럼 자꾸 뛰쳐나가려고 날뛰었다. 은찬은 함께 날뛰려는 스스로의 본성을 억누르고 물길의 고삐를 틀어쥐어 다스리고 방향을 틀려고 공을 들였다.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겠지만 은찬의 속은 지금 전쟁이나 다름 없다. 주도권을 갖기 위한 기싸움. 오래전부터 삼매진화를 다루며 익숙해진 손 쪽으로 기운을 돌린다면 이렇게까진 버겁진 않았겠지만 새 주술이 필요한 방향은 팔이 아니라 심장 쪽이었고 유감스럽게도 은찬은 그전까진 가슴 방향으로 기운을 운용해본 적이 전혀 없었다. 말을 듣지 않는 기운을 끌고 새로운 길을 내는 일이 쉬울리 없단 건 알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더 버거웠다. 원하는 위치에 이르지 못했는데 단전부터 천천히 치솟아 오르는 하늘의 기운에서 화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주술력으로 바뀌기엔 좀 이른 시점이다. 화기가 뭉쳐 밖으로 나오지 못하면 내상에 이른다. 그 순간, 은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본격적으로 기운에 불붙기 전에 모은 것을 흩어버리든지. 아니면, 공들여 내던 길을 단숨에 올라 가슴까지 급하게 끌어올려 주술로 바꾸든지.

조급해지면 안 돼. 은찬은 늘 그렇듯 신중해지려고 애썼고, 그 다음 순간 곧바로 후회했다. 찰나의 고심이었는데도 너무 늦었다. 화기는 어느새 잡기 어려운 수준까지 번져 있어 완전히 흩어버리기 어려웠고, 억지로 심장까지 끌어올리려는 통제에도 벗어나기 시작했다. 되려 은찬이 쳤던 발버둥에 가까운 노력이 화근이 되어 기껏 모았던 기운들이 온 몸에 불똥처럼 튀는 결과만 낳았다.

그 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혈마다 끓어오르는 열이 너무 뜨거웠다. 입을 벌리면 피 대신, 불을 토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몸부림을 치다 쓰러졌는데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던 건지 누군가 달려오는 발소리가 어지럽게 귓가에 흩어졌다. 그게 은찬이 마지막으로 떠올릴 수 있는 그 날의 기억이었다. 은찬은 삼일을 꼬박 앓고 눈을 떴다.

눈을 떴을 때, 은찬의 머리는 더 이상 붉은 색이 아니었다.

-

¹네이버웹툰 둥굴레차! 16화 대사 中
²전에 풀던 흑찬썰 써보았습니다:3 (
http://jean-6ak.tistory.com/17 참고)

'Dungcha'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건은찬:frottage  (0) 2014.10.16
백건은찬:어쩌면 좋지  (0) 2014.10.11
백건은찬:유과  (0) 2014.10.09
현무형제:별 헤는 밤(현우전력60분)  (0) 2014.10.05
현우현오:자기희생  (0) 2014.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