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컴퍼니:진심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네요. 차대리도 다른 직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상한 꿈이라도 꾼 건가요?

올라가서 잊은 물건 가지고 와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같이 퇴근하죠. 


차 대리 꿈 얘기는 그때 들어줄게요.

-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반질한 표면엔 무늬도 없어서 얼굴이 고스란히 비친다. 층을 거슬러 올라가는 내내, 석영은 거기 비친 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썹과 눈초리, 다물린 입매까지 평소와 다른 점을 조금도 발견할 수가 없다. 그 평범한 낯빛 위에 표시되는 빨간 숫자가 하나씩 올라갔다.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네. 석영은 더더욱 삼십분 전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진다. 그 충동은 도대체 뭐였을까. 닫히는 스크린 도어 앞에서 피곤한 발을 잡아채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층수를 헤아리게 만들고 … 거짓말을 구걸하게 만들던 그것. 그 찰나. 석영은 자신이 무너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꿈은 꿈으로, 현실은 현실로. 도면에 삼각자를 대고 직선을 내리긋던 것처럼 분명하게 도림이 그 둘을 구별한 순간, 석영은 한번도 흔들린 적 없는 것처럼 도로 멀쩡해졌다. 


이렇게 별것 아닌 것에, 어떻게 그렇게까지 동요할 수 있었지. 


회사 층수는 그렇게 높지 않다. 곧 문이 열렸다. 뒷목을 문지르며 석영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놓고온 것은 처음부터 없었지만, 일부러 사무실에 들어갔다. 아직도 남아있던 몇과 눈인사를 나누고 처음부터 그게 목적이었던 것처럼 필요도 없는 서류를 한 뭉치 챙겨들었다. 돌아서려다 문득 시선 끄트머리에 연필꽂이에 꽂혀있던 플라스틱 라이터가 걸거쳤다. 저게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더라. 자신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까닭도 못찾고 존재하고 있던 것을, 이유도 없이 함께 챙겨들었다. 비어있던 바지 주머니 한쪽에 가벼운 라이터가 들어찼다. 너무 가벼워 석영은 곧 챙긴 것도 잊어버렸다.


신 과장님.


그는 건물 입구에 서있었다. 서너 계단 밑에서 등을 보인 채. 그러다 석영이 부르자 돌아보며 조금 웃는다. 손에 들고 있던 흰 담배갑이 자켓 안주머니로 모습을 감추고, 도림이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미소짓던 그 과정이 유난히 뚜렷하게 눈에 남았지만, 사라지는 담배갑을 보며 주머니의 라이터를 떠올릴 주변까진 없었다. 다만. 갈까요. 그 한마디에 고개만 주억거린 뒤 그를 따라 걸었을 뿐이다.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은 밤이었다. 비현실적인 꿈의 여운조차 걷힌 것처럼 분명한 현실의 거리를 함께 걸었다. 회사와 동료에 대한 가벼운 농담, 잡답, 소문, 이야기, 충고, 조언 등이 대화의 주 메뉴가 되었다. 거기에 꿈과 거짓말과 욕망이 끼어들 자리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만 같았다.

차대리. 내선 방향이에요? 나도인데, 잘 됐네요.

개찰구를 지나면서는 생각했다. 어쩌면 고맙다고 말해야겠다고. 도림이 그어준 선은 자칫 혼자 우스꽝스럽게 붕괴할 뻔한 자신을 추스를 기준이 되었다. 아까 혼자서는 넘지 못했던 스크린도어의 문 안쪽으로 들어서서 익숙한 높이의 손잡이를 붙들면서, 석영은 조금 피곤한 제 뒷목을 주물렀다. 빠르게 선처럼 흘러가는 야경의 불빛 위로 제 피곤한 얼굴이 거울처럼 떠올랐다.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눈썹과 눈초리, 다물린 입매. 여전히 괜찮네.

……내가 차 대리의 전부를 원한다고 말했을 리가 없어요.

괜찮나?

나는 한평생 타인을 탐내는 그런 염치 없는 짓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차 대리가 부탁한 그런 거짓말은 못 해요.


그 말은 너무 익숙해져 자각도 못하고 있던 지하철의 소음 사이를 파고들고 석영의 허를 찔렀다. 불시에 급소를 얻어맞은 것처럼 명치가 얼얼했다. 차창을 바라보던 시선이 인력에 이끌린 것처럼 곁에서 미소를 띠고 있는 얼굴에 내리꽂혔다. 불가항력이었다. 왜, 지금? 부정은 아까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석영의 구걸은 꿈에 발디딘 것이었고, 도림이 꿈을 부정함으로써 그 모든 기반을 잃었다. 이대로 그냥 어느 현실에 발붙여야 하는지만 가르쳐준다면 다시 이 얘기를 꺼낼 일도 없었을 텐데.

왜 굳이, 한번 더, 이렇게 잔인하게.

그 다음 순간, 석영은 잔인하다는 말을 연상한 스스로에게 놀랐다.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었잖아. 그랬던 것, 아니었나? 갑자기 모든 현실감이 훅 꺼지는 것 같았다. 분명 객차의 바닥을 디디고 손잡이를 붙들고 있었을텐데 더 이상 아무 감각도 무게를 갖지 못했다.

그저 시선만이 묶인 채, 선고를 기다릴 뿐이다.


차 대리가 오해를 하게 되면… 상처 받을 테니까요.

석영은 이미 알았다. 진짜도 아니었을 진심에 매달리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잔열을 몰아내기 위해 꿈 속에서 제 성기를 주무르면서 다른 성감을 돋울 장면들을 마구잡이로 연상했던 것도 그 달기만 한 고백에 내몰려 절정으로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발버둥이었다.

그럼에도, 오늘 다른 말 대신 거짓말을 그에게 애원한 건 매달릴 구석이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석영은 약삭빠르게 가능성을 쟀다. 자신 역시 꺼내보인 적 없는 날것의 진심을 가지고 부딪히는 게 무서워서. 도림에게는 거짓말이었다고 도망칠 구석을 틔워주고, 자기에게도 거짓말에 속은 피해자의 자리를 남겨주기 위해.

그러나 도림은 거짓말을 거절했고, 
석영은….
자신의 밑바닥을 본다.


……내가.

어깨에 닿은 도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훅 꺼졌던 현실의 무게가 거기서부터 천천히 돌아오는 것 같았다. 석영은 더 이상 도망칠 구석이 없다는 걸 이해했다. 발 밑은 낭떠러지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제 남은 선택지는 정답도, 오답도 아닌 단 한가지.

오해도, 거짓말도 이젠 됐습니다.

석영은 다른 쪽 손으로 붙들고 손잡이를 놓았다. 대신에 제 어깨에 올려져있던 도림의 손을 구명줄처럼 꽉, 붙들었다. 한번도 막혀본 적 없는 말문이 턱 막혀, 몇 번 숨을 몰아쉬다가, 겨우 고백했다.

그냥, 제가 지금 너무. 당신을 원해요. 원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도 세련되지 않은 날것의 진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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