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ret K:헨리를 위하여.

Napoleon for Henry

"God. 멀린. 지금이 중요한 시점인데 갑자기 어떻게 본부로 돌아가요.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일단 돌아와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케이. 케이를 위해 하는 말이에요."

그 목소리가 유난히 축축하고 가라앉아 있어서 아이린은 말문이 막혔다. 대답 없는 사이, 그럼, 하는 짤막한 말과 함께 통신이 끊겼다. 공유하고 있던 시야 역시 사라지고 안경알은 도로 투명해진다. 창문 너머엔 모스코의 밤이 있다. 시간은 열시를 넘어가고 있는데 밖은 아직도 환했다. 백야, 잠들지 못하는 밤. 아이린은 한숨을 내쉬며 이번에는 업무용으로 개통한 핸드폰을 꺼냈다. 히드로행 비행기표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린은 마침내 피곤한 얼굴로 본부의 회의실로 들어섰다. 이십 분 정도 늦었지만 솔직히 모스코에서 갑자기 불려왔는데 이정도면 준수한 편이라고 내심 그녀는 투덜거렸다. 만 하루 넘게 비행기에 갇혀있다 내리자마자 달려오느라 시차에 아직 적응 못한 몸이 죽을 맛이었다. 문을 열자 제각기 정해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원탁의 기사들이 보였다. 대부분은 홀로그램이었고 정말로 앉아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God, 나도 그냥 모스코에서 홀로그램으로 착석하면 좋았잖아. 익숙하게 케이의 빈 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 아이린은 속으로 한번 더 투덜거렸다. 회의를 마치고 다시 또 만 하루동안 비행기에 쳐박혀 있을 걸 생각하니 두배로 피곤했다. Shit. 그래서 그녀는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지각한 그녀의 자리 외에도 하나 더 비어있는 자리를.

"늦어서 죄송해요. 아서."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착석하면서 아이린은 그녀의 맞은편을 멋쩍은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공교롭게도 원탁에서 그녀의 정면엔 모드레드의 자리가 있다. 스물 둘의 아이린 허스트를 킹스맨으로 만든 남자. 모드레드는 그녀가 실수할 때마다 가볍게 이마를 찌푸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어린애의 잘못을 발견한 교사처럼. 지각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니 이번에도 못마땅해 할 것이 틀림없다. 아이린은 매를 기다리는 아이라도 된 기분으로 슬쩍 맞은편을 살폈다. 그러나 자리는 비어있다. 놀랍게도. Oh. 아이린은 제 옆에 앉은 베디비어 쪽으로 가볍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모드레드가 지각하는 날이 다 있네요."

그건 정말 별 의미없이 던진 농담이었다. 베디비어는 세심한 사람이다. 실없는 농담에도 가볍게 웃어주고 맞장구를 쳐주는. 게다가 그녀가 그에게 달려가 모드레드의 험담을 한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아이린은 당연하게 돌아올 그의 조금 낮은 웃음소리나 그러게 말이네, 하는 조용한 대꾸를 기대했다.

그러나 베디비어는 침묵했다. 사실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아이린은 그제야 원탁에 눌러붙은 무겁고 우울한 침묵을 알아차렸다.

"케이. It's yours."

아서만이 그 적막을 깨고 잔을 내밀었다. 나폴레옹 꼬냑. 1815년산. 뒤통수를 거대한 둔기로 후려맞은 것처럼 충격이 뒤늦게 온몸을 휩쓸었다. 아이린은 말문이 막혔다. 케이를 위해 하는 말이에요. 무리한 귀환을 요청하던 멀린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모드레드는 뛰어난 킹스맨이었고, 그의 기억은 영원히 우리 안에 남을 걸세. 아서의 연설 역시 귓바퀴에 고여 고막 안으로 흘러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순간 완벽한 귀머거리였다. 아무 말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To modred."

아서가 선창했고 모두가 따라 잔을 들었다. 홀로그램으로 착석한 사람들 역시 잔을 비웠다. 작은 잔에 얄팍하게 찰랑이던 한 모금의 술이 금세 사라졌다. 한 모금의 모드레드, 아니 헨리 로이스턴이 사라지는 광경을 아이린은 보고 있었다….

"케이."

"…재촉하지 않는 게 좋겠네. 아서."

유일하게 잔을 들지 못하는 자신을 재촉하듯 아이린의 코드네임이 불린다. 그런 아서를 만류하는 베디비어의 목소리 역시 들렸다. 24시간이네. GMT 기준 9 PM까지 모드레드가 될 후보생을 선발해 보고하게. 명령. 안경을 벗고 사라지는 홀로그램과 하나 둘 자리를 뜰 때마다 나던 바닥에 의자 끌리는 소음들. 

아이린은 그 모든 광경에서 완벽하게 괴리되어 있었다. 

여전히 제 몫의 잔에 술은 고여있었지만 그녀는 차마 거기에 손을 댈 수도 없었다. 너무 작다. 부릅뜬 눈으로 그 잔을 노려보며 아이린은 생각했다. 헨리는 삼십 년 가까이 모드레드였다. 그 작은 잔에는 불혹을 훌쩍 넘긴 헨리의 일생은 커녕, 그가 감당해 왔던 모드레드의 이름의 파편조차 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그 잔조차 가득 채우지 못한 이 한 모금의 황금빛 술이 그의 무덤에 바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니.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아니, 납득할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아이린은 한번도 헨리의 죽음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그는 그녀의 구원자였다. 아이린은 항상 그에게 목숨을 빚진 입장이었지, 주제넘게 그의 목숨을 염려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순간 그녀가 가장 납득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죽음 그 자체였다. 정말 우습게도 그녀는 그가 불멸하리라고 내심 믿었던 것이다. 어떻게 당신이 죽을 수가 있지. 어떻게 당신이 나를 두고. 이제 그녀는 맹렬한 배신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이린."

모두가 자리를 비운 홀에서 마지막까지 곁을 남아 있었던 베디비어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얇은 이브닝드레스를 걸친 어깨 위로 조금 두툼한 자켓이 덮어졌다. 그제서야 아이린은 자신이 떨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베디비어는 그녀를 이해한다거나 섣부른 위로를 건네는 대신에 말했다.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슬기롭게 그녀를 위해 홀을 비워주었다. 아이린은 뒷목 위로 떨어진 베디비어의 말이 그녀를 간지럽히는 것을 느꼈다. 간지러움은 점점 퍼진다. 잔을 오래 노려본 시큰한 눈과, 메이기 시작하는 목, 떨리는 눈꺼풀, 경련하는 뺨, 자각없이 깨물고 있던 입술까지. 그러다 어느 순간 참을 수 없어지는 것이다.

아이린은 울었다. 한 모금의 나폴레옹에 전부 담길 수 없는 헨리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