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건은찬:민모션 증후군

딱 한번, 주은찬이 우는 걸 본 적이 있다.

열 둘인가, 열 셋인가. 처음으로 내가 고집을 부려 대전까지 내려갔던 어느 여름방학이었다. 마지막까지 주은찬은 내가 찾아오는 걸 내켜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그냥 자기가 올라가겠다면서 나를 말리느라 전전긍긍했던 전화 속 목소리가 생각난다. 난 그게 그냥 부끄러워 빼는 반응인 줄만 알았지. 결국 고집을 꺾지 않고 짐까지 바리바리 싸든 채 찾아온 나를 보면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은찬은 웃었다. 가벼운 한숨과 못말리겠다며 흔드는 고개짓. 그럼에도 그 뒤로 전부 다 감추지 못한 어린애같은 들뜬 기색과 설레임이 엿보여서 나는 내 짐작이 틀린 줄도 몰랐다. 주은찬은 내 손목을 잡아 끌고 산 중턱에 쳐박혀있다는 주작가 수련실에도 데려갔고 대전 시내로 나가 실컷 구경시키기도 했다. 더 좋은 것만 더 많이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처럼. 하지만 사실 나는 다른 어떤 곳보다도 주은찬이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을 작은 방 안에서 나란히 뒹굴대는 시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 날도, 그런 날이었다. 나와 주은찬은 좁은 침대 위에 나란히 엎드려 작은 화면을 노려보며 게임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실제로 대련을 할 때는 열에 아홉은 내가 이겼지만 게임 속에선 좀 달랐다.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주은찬은 컨이 좋은 편이었다. 마음만 앞서 마구잡이로 키를 눌러대는 나와는 다르게. 그 때도 아마 주은찬이 이겼었을 것이다. 있는대로 짜증을 부리며 한판 더하자고 주은찬에게 뻗댔던 기억이 난다. 주은찬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가차없이 그런 나를 뿌리치고 일어섰었다. 어떻게하면 주은찬을 보기 좋게 바를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나는 기다렸고, 또 기다렸다. 처음에는 이렇게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고 투덜거렸다. 돌아오면 변비였냐고 실컷 비웃어줘야겠다는 결심도 했다. 삼십분이 지나고나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좁은 방문을 열고 나는 걸어나갔다. 익숙하지 않은 복도를 걷고 마당을 돌아다니면서 주은찬을 찾았다. 그러다가 보았다.


아무도 다니지 않을 것 같은 저택 뒤편 구석에서 혼자 주저앉은 채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는 옆모습.


처음엔 뭐하고 있는지 몰랐다. 아무 생각없이 여기서 뭐하냐고 이름을 부르려다가 멈칫한 것은 잘게 떨리는 어깨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숨죽인 흐느낌마저 없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직감적으로 나는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아챘다. 알아채자마자 심장이 견딜 수 없이 쿵쾅거렸다. 나는, 도망쳤다. 벽 뒤로 급히 몸을 숨겼다가 이내 걸어온 길을 거슬러 돌아갔다. 작은 방 안으로 재빨리 돌아와 침대에 엎드려 자는 척을 했다.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 주은찬이 돌아와 나를 깨웠다. 미안, 건아. 엄마가 갑자기 심부름을 시켜서. 나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왜 갑자기 울었는지, 무슨 괴롭힘이라도 당했는지. 어째서 소리도 내지 않고 혼자 입을 틀어막았는지. 알고 싶은만큼 알기 무섭기도 했다. 목구멍 안에서 온갖 질문들이 다글다글 끓어올랐지만, 결국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건 의미없는 짧은 투덜거림 뿐이었다. 주은찬은 그저 멋쩍게 웃기만 했다. 사르르 접혀 쳐진 눈꼬리에 물기는 없었지만 차라리 거기가 눈물 자국으로 붉어진 편이 나았을 것이다. 눈가 대신 손등에 깊게 남아있는 붉은 잇자국을 발견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잇자국은 금방 사라졌지만 그 뒤로 나는 주은찬더러 속없다는 소리는 농담으로도 못하게 됐다. 종종 장난처럼, 혹은 우연을 가장해서 주은찬의 손을 뒤집어보고 손등에 남은 잇자국이 없는지 확인하는 일은 내 버릇이 되었다. 주은찬의 손등은 그 뒤로 쭉 깨끗했는데, 내심 나는 그게 기분 좋았다. 이제는 괜찮나보다 싶어서. 그게 어쩌면 내 덕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더 그랬다. 내가 받았던 것처럼 주은찬도 나 때문에 위로받아서, 그래서 괜찮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내가 참, 순진했지. 

너는 그냥 눈치챈 것이다. 내가 네 손등에 남는 잇자국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걸. 


신령 하나가 틈타 내려와 중앙의 창고를 들쑤시고 난 후였다. 사신 후계가 넷이나 있으니 막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정작 봉인술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으니 도무지 끝이 나질 않았다. 대치가 길어지고 다들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했을 무렵에 신령의 발악에 청룡이 어깨를 물어뜯겼다. 현무는 그 아가리를 청룡의 어깨에서 떼어내려다 꼬리에 후려맞고 나가떨어졌고, 나는 그런 신령을 양 팔로 조르며 버팅겼다. 소동은 현 주작이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주작문을 열어젖히며 나타난 뒤에야 겨우 끝났다. 그토록 오래 난동을 피웠던 신령은 현 주작이 허공에 맺은 수인 하나에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봉인당했다. 오래 하늘을 비울 수 없는 그녀가 돌아가고난 뒤, 넷 모두 허탈한 정적 속에 남겨졌다. 가장 먼저 그 침묵을 깬 것은 청룡이었다. 물어뜯긴 어깨를 꾹 눌러 지혈하면서 내뱉은 신경질적인 투덜거림이 적막을 갈랐다.


주술사가 둘이나 있으면 뭐해. 제대로인 녀석이 없는데. 


생각없이 지껄이는 저 지랄맞은 입. 한 대 후려패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충동을 행동으로 옮기는 대신 시선을 돌렸다. 솔직히 입 밖으로 꺼낼 만큼 눈치 없는 게 청룡이었을 뿐, 침묵 속에서 다들 비슷한 생각을 어쩔 수 없이 떠올렸을 것이다. 주은찬이 봉인술을 쓸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걸.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들. 주은찬 역시, 아니 주은찬이 누구보다 먼저 그런 생각을 했겠지. 그래서 신경쓰였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가만히 서있는 주은찬이. 지친 것처럼 힘이 빠진 어깨와, 땅에 못박혀있는 시선 따위가. 불안감에 나는 입을 뗐다. 넋빠져있는 것처럼 서있는 주은찬을 불러세우기 위해서였다. 야, 주은찬. 주은찬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대답은 내가 아닌 아직가지 불퉁하게 입을 내민 청룡에게로 돌아간다. 미안해, 가람아. 내가 봉인술을 쓸 수 있었으면 이렇게 고생 안해도 되는 건데. 멋쩍은 웃음을 매달고 주은찬은 그렇게 말을 꺼냈다. 청룡도 그제야 민망해졌는지 아니, 뭐, 하며 어물쩡 말을 흐린다. 으, 옷이 전부 먼지 투성이가 됐네. 나 먼저 좀 씻어도 되지? 그렇게 말하는 주은찬은 정말로 괜찮아 보였다. 멀쩡한 것처럼 보였다.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목소리도, 멋쩍게 웃는 표정도. 


하지만 나는 그 표정을 알고 있다. 엄마의 심부름을 핑계삼던 그 날과 꼭 같은 웃음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 느끼며, 나는 재빨리 따라나갔다. 씻는다면서 나간 주제에 섬돌 위에는 신발이 없다. 놀랍지도 않았다. 공연히 방을 뒤지는 대신에 나는 뒷마당으로 돌아갔다. 사람이 잘 다니지도 않는 구석, 당연한 순서처럼 거기서 너의 뒷모습을 발견한다. 어릴 적과 똑같이 여전히 주은찬의 울음에는 소리가 없다. 유일한 차이점은 주은찬이 눈물을 삼키기위해 깨물고 있는 것이 손등이 아니라 입술이라는 점 뿐. 계절이 바뀔 때마다 너덜너덜해지는 주은찬의 입술을 백은은 안타까워하며 입술보호제를 발라주었고 나는 그 옆에서 쯧쯧 혀를 찼었다. 그러면 주은찬은 원래 잘 부르트는 체질이라고 변명했지. 의심도 없이 그 말을 믿고 있었다.


어쩌면 그 때처럼,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너의 늪을 들여다 볼 용기를 낼 필요도, 억지로 감춘 불편한 부분을 들쑤셔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어진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전과 똑같이 시덥잖은 농담에 웃고 함께 지겨운 수련을 견뎌내는 일상. 그리고 너는 여전한 얼굴로 웃으면서 손등과 입술을, 또 다른 어딘가를 남몰래 너덜너덜하게 만들겠지. 상상하자 심장이 쿵쾅거렸고, 견딜 수 없이 숨이 답답하게 막혔다. 


그래서 나는 선택했다. 


기척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가 거리를 좁혔다. 도망칠 틈을 주지 않고 어깨를 붙잡아 돌려세웠다. 건아? 잠깐, 왜…. 깜짝 놀라 나를 올려다보는 주은찬의 눈가는 여전히 건조했지만, 나는 거기 고이지 못한 눈물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다. 날카로운 이에 짓눌려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한 입술에 잠깐 시선을 빼앗겼다가, 나는 결국 입맞췄다. 입술 위에 맺힌 새빨간 눈물들을 전부 마시고 벌어진 상처들을 핥고 헤집었다. 충동적인 행동이었지만, 그 순간 내가 오래전부터 이 일을 바라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처음부터 나는 흐르지 않는 주은찬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네가 울어야 한다.


가슴을 밀어내려는 발버둥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무시했다. 오히려 나는 발버둥칠 공간조차 남기지 않고 주은찬을 가두고 몰아붙였다. 호흡을 채우기 위해 잠깐 입술을 뗐을 때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대전으로 처음 부득불 우겨서 내려갔을 때 본 표정 같기도 했다. 너는 오지 말라고 했지. 오려는 나를 필사적으로 말렸다. 너를 좋아하지 않는 가문 사람들의 모습을 내가 알게 될까봐 무서웠던 것이다. 좋은 모습들만 보여주고 나쁜 것들은 전부 감추고 싶어서. 그런데도 나는 먼 거리를 훌쩍 뛰어넘어 너의 집 대문을 두드리고, 억지로 잠긴 빗장을 열리게 했다. 지금도 나는 그럴 작정이었다.


주은찬, 그렇게 참고 싶으면, 차라리 내 혀를 깨물어.


맞댄 입술 위에서 낮게 으르렁거리며 속삭이자 주은찬은 움찔 몸을 떨었다. 나는 그 반응을 기다리는 대신, 무작정 다시 쳐들어갔다. 억지로 비집어 벌린 입 안에 밀고 들어가 멋대로 휘저었다. 입천장을 문지르고 굳어있는 혀를 감아 당긴다. 주은찬은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내 어깨를 두드렸지만, 내 혀나 입술을 깨물 엄두는 못냈다. 그럴 줄 알았다. 절대로 나를 상처입히지 못할 그 상냥함을 나는 이용하는 중이었다. 주은찬은,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참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혼자 문드러지는 마음을 감춘 단단한 빗장을 깨부수고 싶었다.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네가 나에게 열리기를 바랐다.

호흡이 모자라 허덕이던 주은찬의 입 안에서 억눌린 소리가 신음과 뒤섞여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곧 아주 크고 긴 울음으로 터졌다. 한 뼘 공간도 없이 맞닿아있는 뺨 사이로 뜨겁고 축축한 눈물이 스며드는게 느껴지기 시작할 때, 나는 긴 입맞춤을 끝내고 입술을 뗐다. 대신에 터져나오기 시작한 눈물로 엉망이 된 못생긴 얼굴을 꽉 끌어안았다. 조금 지나자 등을 마주 끌어안고 매달리는 게 느껴졌다. 주은찬은 그대로 어린아이처럼 펑펑 오랫동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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