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은찬:애착과 집착의 정의

청가람에게는 벽이 있다.
그를 만나본 사람들의 평가는 죄다 그런 식으로 끝났다. 혼자 다른 공간에 격리된 것처럼 주변에 무관심한 태도와 먼저 말을 걸어도 귀찮다는 듯 무안하게 끊어버리는 모습을 생각하면 그런 평가가 박하다고 불평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애초에 청가람이라면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든지 신경조차 쓰지 않겠지만. 가입한 동아리도 없고 과내 행사는 언제나 불참. 그렇다고 강의에 대단히 열의를 보이는 공부벌레 타입도 아니었다. 과제나 수업에 늦는 법도 빠지는 일도 없지만 늘 흥미는 없어보였다. 딱 최소한, 꼭 필요한 일들만,이 모토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청가람을 학생이나 교수들 모두 어렵고 불편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은찬만은 그런 가람의 모습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람이 주변을 단절시키고 벽을 치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과거에 지독하게 상처받은 일이 있든지, 사람에게 실망하고 기대를 닫아버렸다든지 뭐 그런 뻔한 이유들. 어쩌면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내면을 가리기 위한 벽일지도 모르고. 창가에서 언제나처럼 무관심한 얼굴로 강사를 바라보는 단정한 옆선을 보고 있자니, 그 벽을 벗겨보고 싶다는 충동이 처음으로 치밀었다. 십년지기인 백건이 은찬의 시선 끝이 걸려있는 곳을 가장 먼저 눈치챘다. 주은찬, 관두는 게 좋을 걸.

저거 존나 또라이같은 눈 하고 있어.

백건이 사람보는 눈은 정확했던 모양이다. 은찬은 그 금쪽같은 충고를 한귀로 팔랑팔랑 흘려버린 과거의 자신을 죽여버리고 싶어졌다. 그 때, 뭐라고 대답했더라. 의외로 저런 애들이 알기 쉽던데, 였나. 하,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청가람은 첫 허들만 넘고 나면 다가가기 어려운 타입은 아니었다. 견고해보이는 외성 안은 사람의 애정에 대한 면역이 없어 말랑하기만 하다. 가람아, 하고 다정하게 말을 붙이면 귓가를 슬쩍 붉히며 고개를 돌려버리고, 지나가가 던진 뭐 갖고싶다거나 먹고싶다는 말들을 무시하는 척 하면서도 결국 챙겨주기도 했다. 어렵게 돌려서 말한 걸 눈치채주면 큰 눈이 반짝 떠지고, 그냥 모른 척 무시하면 어깨가 쳐진다. 처음에는 그 순정만화를 그대로 따온 것 같은 반응이 귀엽기도, 풋풋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맛난 음식도 석달 열흘을 내리 먹으면 물리기 마련. 은찬의 관심은 금세 지겨움으로 변질되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은찬이 흥미를 느꼈던 건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벽을 세운 청가람이었지, 제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또 그게 표정에 고스란히 보이는 뻔한 청가람이 아니었으니까. 이미 잡힌 물고기나 다름없는 청가람에게 무관심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이별을 준비했다. 은찬은 만남에 익숙한 만큼이나 이별에도 대단히 익숙했고 또 능숙했다. 차가운 말투, 은근하면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무관심. 변한 모습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알아서 떨어지게 만드는 일은 은찬의 특기다. 마음을 파고드는 다정함만큼 세심한 심리게임이라는 점에서 그랬다. 하물며 상대는 꼬여내는 것도 간단했던 청가람이다. 당연히 이번에도 간단하게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다.

백건이 옳았다. 
청가람은 또라이였다. 그것도 단단하게 미쳐있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해서 몸서리가 쳐진다. 발목에 걸린 가죽 족갑에서 사슬이 덜걱대는 둔한 소음이 울렸다. 그렇다. 은찬은 지금 족갑에 묶인 채로 감금당한 상태였다. 물론 범인은 저기 사슬의 덜걱거리는 작은 소음만 듣고도 알아채서 다가오는 청가람이다. 

어쩌다 내 신세가 이렇게 되었을까. 은찬은 울컥 치미는 서러움과 억울함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미 아랫입술은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상처들때문에 엉망이었다. 그걸 발견한 청가람이 손을 뻗어 엄지로 아랫입술을 어루만지더니 꽉 힘이 들어간채로 다물린 입을 억지로 비집고들어와 깨물지 못하게 했다. 주은찬, 그러지 마. 피나잖아. 흉하게. 투덜거리는 말투지만 걱정이 뚝뚝 묻어난다. 예전에는 그런게 다정하다고 생각했고, 촌스럽다고도 느꼈었다. 지금은, 그냥 역겹다. 은찬은 입안에 기어들어와 혀를 문지르는 손가락을 사양하지 않고 힘껏 깨물었다. 콰직하는 살 찢어지는 소리가 나고, 입 안에 철냄새가 풍겼다. 하지만 가람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꼭 본인의 아픔을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은찬이 이별을 준비할 때도, 가람은 그랬다. 아무리 냉담하게 굴고, 무관심을 가장해 상처를 줘도 끄떡없었다. 시무룩하거나 조금 빈정상하거나, 삐진 모습은 여전했지만 전처럼 은찬이 풀어주거나 달래주지 않아도 곧 똑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와 은찬에게 다정함을 베풀었다. 돌아와야할 상처입은 반응이 없으니 은찬의 공격은 더 노골적이고 날이 서기 시작했다. 전에는 평판을 위해 적어도 웃고 있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미안하다며 약속을 미루고 거절하고 피했다면, 점점 더 대놓고 찡그리며 무시하는 수준으로 번져갔다. 친한 동기들마저 청가람과 싸웠냐며 의아하게 여길 정도였다. 그랬는데도, 청가람은 여전했다.

청가람은 자신을 일부러 피하기 위해 동방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는 은찬을 찾아와 같이 돌아가자고 말하고 매번 거절을 당했다. 미안해, 가람아. 선약이 있어서, 지금 급한 일이 생겨서 같이 못가. 먼저 갈래. 상냥했던 거절의 말은 점점 짧아졌다. 아냐, 됐어. 기다리지 마. 지금 안 갈 거야. 그러면 뭐 그렇게 매일 바쁘냐며 툴툴거리면서 입을 삐죽이고 돌아간다. 은찬의 노골적인 거절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질겼다. 질렸다. 은찬의 인내심은 진작에 바닥났다.

그래서 백건을 끌어들였다. 일부러 찾아오는 시간에 맞춰서 동방에서 뒹굴었다. 백건은 귀찮은 사랑싸움에 새우등터지고 싶지는 않다면서 한번의 사정 후에 가버렸다. 은찬은 혼자 정액 냄새가 가시지 않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담배를 피웠다. 청가람은 이제 비겁하게 모른 척 어물쩡 관계의 균열을 덮고 넘어가진 못할 것이다. 벌컥, 동방문이 열렸다. 바깥 공기를 쐬다 왔으니 좁은 동방 안에 퍼진 밤꽃 냄새가 지독할 것이다. 은찬의 예상은 얼추 들어맞았다. 청가람은 처음으로 싸늘한 목소리를 냈다.

누구야, 그게 뭐가 중요해. 네가 아니라는 게 중요하지. 주은찬, 변명해 봐. 무슨 말. 하고 싶어서 했는데.

그 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머리채를 쥐어잡혀 끌려내려온 것 같았다. 동방의 바닥은 싸늘한 시멘트 바닥이다. 봐주지 않고 강하게 쾅 그대로 메다꽂았다. 아마 그 바닥 어딘가에는 은찬의 이마에 남은 상처의 흔적이 핏자국으로 찍혀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깨어나니 이미 여기였으며, 자신이 이주 넘게 이 방 안에 애완견처럼 잡혀있다는 점이다. 노예가 아니라 애완견이라는 점이 우습겠지만 그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없었다. 발목에 채운 가죽 족갑에 쓸리기라도 할 까봐 손수건으로 감싸고 끼니 때마다 직접 식사를 준비해서 차려준다. 먹길 거부하면 아래턱을 강한 악력으로 잡아 벌리고 밀어넣기도 했다. 이마의 상처는 매일 소독하고 새로운 거즈로 싸맨다. 솔직히 발목의 족갑을 논외로 친다면 친엄마보다 더 엄마같이. 끌려온 뒤로 손찌검 역시 한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한번 맞은 기억이 쉽게 사라질 리 없다. 은찬은 작은 체구와 곱상한 얼굴을 한 청가람이 그렇게 힘이 셀거라곤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했고 그런만큼 더 놀랐다. 가람이 손을 들어올릴 때마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거리게 된 것도 그 날의 트라우마가 원인이다. 그러자 청가람은 은찬의 앞에서 손을 숨기기 시작했다. 눈물나게 섬세하고 끔찍한 배려였다.

청가람 손에서 흐르는 피가 잇몸 아래쪽에 고이다가 어정쩡하게 입 밖으로 흘러나와 뚝뚝 떨어지는데도 청가람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히 비위만 상해 은찬은 그 손가락을 입 안에서 퉤 뱄었다. 청가람은 깊이 물어뜯긴 상처를 내려다보다가 대강 휴지로 성의없이 상처를 틀어막았다. 은찬의 이마에 상처에 소독약을 꼼꼼히 발라주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 광경을 질린 얼굴로 내려다보다가 은찬은 고개를 돌리며 입안에 고인 피와 함께 한 마디를 바닥에 내뱉었다.

너 진짜 미친 놈이야. 알아?

처음 깨어났을 때도 은찬은 똑같은 말을 했었다. 당장 이거 풀라고 팔다리를 흔들고 발광하면서 악에 받쳐 미친 또라이새끼라고 욕하고 소리질렀다. 가람의 대답 역시 똑같겠지. 무슨 소리야 주은찬. 니가 날 이렇게 만들었으면서. 뒤에 이어질 말마저 뻔하다.

말했잖아. 지금까지 네 맘대로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으니까,
이제 나도 나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라고.

싱긋 웃는 예쁘장한 얼굴에 오히려 속에서는 신물이 올라온다. 하지만 눈을 질끈 감는 것 외엔 도망칠 곳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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