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컴퍼니:Sugar crush



밤 열시가 다 되가는 시간이었는데도 사무실엔 아직도 불이 환하다. 다들 퇴근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들처럼 군다. 그 길고 인상깊은 꿈,을 생각하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꿈은 꿈이지. 피곤한 눈두덩을 꾹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현실'에서도 그는 근 삼일 가까이 철야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거기에 추가로 삼일치의 기억이 얹혀지자 당장 선 채로 졸도할 수도 있을 만큼 피곤해진다. 어차피 그는 데드라인보다 앞서서 사는 사람이었고 지금 막 삼일을 공들인 프로젝트를 마무리지은 참이었다. 여덟시간 정도의 지연은 문제도 안될 것이다. 벌써 퇴근하냐는 말들, 잘 들어가라는 인사들을 들으며 가방을 고쳐맸다. 매일 보던 얼굴들인데도 어쩐지 간지러운 민망함이 올라와 시선을 슬쩍 피하게 되는 건 역시 그 꿈때문이겠지. 사실 어디가서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적나라하긴 했다. 욕구불만이었나, 집에 가면 취향껏 정리해둔 컬렉션이나 열어봐야겠다. 하얗고 어리고 말랑말랑한 것들을 잔뜩 본 뒤, 진짜로 푹 잠들고 나면, 그 이상한 꿈도 곧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 수고했어요. 차 대리.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봐요.

아무것도 아니어야 하는데. 지하철 문이 눈 앞에서 닫히는 모습을 석영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스스로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열린 문에 그대로 한걸음 걸어들어가 몸을 실으면, 삼십분 뒤엔 안락한 자신의 오피스텔에 들어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는 우유부단하거나 오래 고민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판단과 행동이 어긋나 본 경험도 없다. 그러나 지금, 모든 경험이 자신을 배신한다. 그는 한참 서있다가 걸음을 돌렸다. 피곤함을 느끼며 터덜터덜 내려왔던 역사의 계단을 도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걷다보니 조금 조급해져서, 익숙한 길을 되밟아 다시 건물 앞에 이르렀을 때는 뛰는 것에 가까웠다. 덜 가라앉은 숨을 몰아쉬며, 로비의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한층씩 내려오고 있는 숫자를 눈으로 가늠하며 고민한다. 몇층으로 가야할까. 몇층에서 그를 찾을 수….

문이 열렸다. 

신과장님.

…차대리? 퇴근한 것 아니었어요?

아, 두고간 게 있어서요. 아까 이미 간다고 너스레는 다 떨었는데, 다시 뵈니까 민망하네요. 과장님도 지금 들어가시는 겁니까? 네. 슬슬 들어가봐야죠. 차대리도 그렇게 실수하는 날이 다 있네요. 올라가봐요. 내일 봅시다. 네. 쉬십시오. 그럼. 그는, 이 외에도 자신이 하기 적절한 대답과 그에 이어질 무난하고 순탄한 반응들을 수십 가지는 떠올릴 수 있었다. 꿈은 꿈, 현실은 현실. 그는 지금껏 불확실함과 불분명함이 자기의 세계를 어지럽히도록 허락해 본 적이 없다. 건물의 선과 면처럼, 직각으로 직교하는 설계도처럼. 그는 분명하고 깔끔하고 확실한 것들을 좋아했다. 머릿속에 이미 떠오르는 수십 개의 '정답' 중 하나를 택하기만 한다면, 그의 세계는 여전히 견고하게 서있을 것이다.

과장님, 부탁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의 '오답'을 고른다. 내리려는 그를 막아서고 성큼, 열린 문 안으로 걸음을 뗐다. 팔을 부드럽게 붙들고 그를 내려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무너지는 순간에 서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 만큼, 목소리에는 떨림이 없었다. 애초에 믿어선 안되는 줄 알면서도 꿈 속에서조차 그 거짓말들에 이미 흔들렸던 순간부터, 붕괴는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었다. 진심도 없는 그의 고백들이, 너무 달았다.

제 전부를 원하신다고, 한번 더. 거짓말 해주십시오.

제가 계속 오해할 수 있게.

그리고 그는 원래 달콤한 것에 너무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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