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건은찬:완벽한 밤

모든 것이 완벽한 밤이었다.
몇 달을 은찬의 골머리를 썪게 만든 이직 문제도 지난 주로 완전히 해결되었고, 덕분에 간만에 단골바에 들를 여유도 생겼다. 아끼던 셔츠와 자켓을 꺼내고, 타이는 새로 산 와인색을 맸다. 취준하는 내내 서랍에 쳐박아뒀던 버버리 썸머도 오랜만에 개봉했다. 적당히 세운 붉은 기 도는 머리카락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면서 은찬은 거울을 향해 씩 웃었다. 아주 괜찮은 예감이 들었다.

… 뭐 하실 말이라도 있습니까?
아, 너무 잘생겨서 그만.

이건 괜찮은 정도가 아닌데.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기분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은찬은 슬쩍 웃었다. 아부를 아부처럼 들리지 않게 말하는 건 은찬의 재주 중 하나였다. 진부한 대사가 순식간에 진솔한 칭찬이 된다. 아니 솔직히, 전부 다 인사치레는 아니었다. 눈에 띄는 밝은 머리색보다 날렵한 인상과 매끈한 이목구비가 더 눈길을 잡아끈다. 선명한 옆선과 살짝 내리깐 시선. 진짜, 잘생겼어.

은찬은 차가운 마티니 잔을 괜히 손끝으로 문지르면서 안달나는 기색을 감췄다. 대신에 눈을 슬쩍 접으면서 웃었다. 은찬은 자신이 언제 매력적인지 잘 알았다. 머리와 어울리는 와인색의 넥타이, 반대로 채도가 낮은 짙은 남색 자켓은 그런 선택의 결과였다. 너무 무겁지 않은 시트러스 우디 향이 아직 손목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한 밤. 약간의 자신감이 만용이 아니라 매력으로 돋보일 만한 완벽한 순간이었다. 예감이 좋다. 은찬은 지는 게임에 배팅하는 취미가 없었다. 접힌 
눈꼬리에는 호감을 매달고 슬쩍 가까이 몸을 기울인다. 바의 주황빛 조명이 뺨 위로 쏟아졌다. 비밀처럼 은근하게 은찬은 속삭였다.


연상, 좋아해요?


-


씻고 옵니다.

방금 무슨. 은찬은 눈을 깜빡였다. 침대 모서리에 앉아 긴장감도 없이 다리나 흔들거리면서 넋놓고 있다가 당했다. 닫힌 욕실 문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은찬은 온기가 남은 제 입술을 슬쩍 문질렀다. 먼저 씻고 오겠다는 단정하고 멋없는 말과 함께 지금 막 그가 입맞춘 자리다. 푸흐. 웃음이 터졌다. 뺄 줄만 아는 샌님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손이 빠르다. 금방 다녀올테니 어디로 튀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라는 뜻이라도 되는 건가.

건조하고 짧은 입맞춤. 혀도 섞기 전인데 얇은 피부 사이로 맞닿아 전해지는 체온이 뜨겁단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마티니 잔을 만지던 손끝으로 은찬은 이제 제 입술을 가볍게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얼굴이었는데, 한번 눈에 뿌듯하게 차고 나니 행동 하나하나가 다 귀엽다. 점점 더 맘에 들었다. 은찬은 욕실에서 나는 샤워소리를 감상하며 픽 웃었다. 

뭐, 괜찮네.

닫힌 문이 열리기까진 시간이 퍽 걸렸다. 핸드폰이라도 들여다보지 않았으면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숫처녀처럼 그 잘생긴 얼굴로 잔뜩 긴장이라도 해서 못 나오는 건 아닌가 상상하며 킥킥대는 것도 잠깐이지. 긴 기다림에 가벼운 심술기까지 올라오려고 할 때쯤, 문이 열렸다. 은찬은 누워있던 몸을 반쯤 일으키고 그를 돌아보았다. 가볍게 투덜거리기라도 할 셈이었다.

진짜 오래 씻네요.

그러나 은찬은 곧 투덜거림을 들숨과 함께 삼켰다. 젖은 머리와 걸친 가운 사이로 드러나는 단단한 가슴. 이렇게 취향이기도 쉽지 않은데. … 섹시해서 봐준다. 진심을 농담처럼 중얼거리면서 은찬은 입술을 혀끝으로 쓸어올렸다. 절로 군침이 도는 구석이 있었다. 졸리고 지루했던 공기를 순식간에 당겨진 실처럼 팽팽한 성적 긴장감으로 바꾸면서 남자는 가까이 다가왔다. 제 셔츠의 단추를 먼저 끌러내던 성급한 은찬의 손길이 자꾸 단추 위에서 헛돌았다.

그러나 남자의 손은 빗나가는 일 없이 정확하게 은찬의 턱을 틀어쥔다. 거칠기보다는 단단한 힘이 은찬의 시선을 고정시킨다. 하지만 그가 굳이 그러지 않았어도 눈을 떼진 못했을 것이다. 잘 빚은 것처럼 예쁜 얼굴로 남자가 부드럽게 웃었기 때문이다. 예쁜 것은 언제나 은찬을 약하게 만들었다.

애 태우려고.
와, 성격… 응. 

말이 끝나기 전, 입술이 도로 찾아왔다. 두번째 입맞춤은 처음처럼 건조하고 깔끔하지만은 않았다. 은찬은 벌어진 틈으로 축축한 혀가 밀려드는 것을 느끼면서 단단한 어깨를 끌어안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모든 것이 완벽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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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운한 아침이었다. 간밤 기분좋았던 섹스의 여운으로 몸은 약간 무거웠지만, 그 정도야 뭐. 은찬은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타이를 맸다. 와인빛의 무늬가 화려했던 그거 말고. 차분한 곤색에 은색 줄무늬가 가지런히 들어간 깔끔한 타이를. 자켓과 바지는 너무 어둡지 않은 회색. 왁스로 슬쩍 세웠던 머리카락은 다시 단정하게 정리했다. 첫인상은 중요한 법이다. 게다가 어렵게 구한 새 직장으로 첫 출근하는 길이라면 더 그렇지. 준비를 끝마친 뒤 거울을 향해 은찬은 가볍게 웃어보였다. 아주 괜찮은 예감이 들었.

당신이 새로운 신입사원?

취소한다.

잘 부탁합니다. 팀장인 백건입니다.

아니, 시발. 스물 네살이라며? 은찬은 백건이든 조물주든 멱살을 붙잡고 따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왜 그대로 보내기 아까울 정도로 죽여줬던 지난 밤의 원나잇 파트너가 새로운 직장의 팀장 자리에 앉아있는 건지. 하지만, 은찬이 할 수 있던 건 영 수습안되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으면서.

…아, 네. … 잘 부탁드립니다.

어설픈 인사를 건네는 것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