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부자:복수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을까.


매끈한 턱을 한 손에 잡아쥔 채 가람은 손끝까지 욱신거리는 쾌감을 느꼈다. 비로소 오래 막혀있던 혈관이 터지고 피가 도는 기분이었다. 말초부터 바늘을 다닥다닥 꽂은 것 같은 짜릿짜릿한 감각. 아, 이대로 짓눌러 부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람은 알 수 있었다. 그건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전투의 감각이다. 상대가 나보다 강한지 약한지 가늠하는 것.

가람은 지금껏 그 날카로운 용의 감각으로 눈앞의 상대가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사실만 뼈저리게 느껴왔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깨달았다. 지금의 그는 적수가 못된다.

청룡강림이라니, 현 청룡인가?

다갈색 눈썹이 가볍게 찌푸려진다. 가람에게 익숙한 표정이다. 그는 늘 제게 인상을 썼다. 사신강림으로 늙지도 않는 미간은 가람을 향할 때면 항상 사정없이 구겨졌었다. 명백히 질투하는 얼굴이었다. 엄마와 함께할 수 있는 자신을. 정작 제 아들은 제 엄마를 질투하게 만들어놓고. 그래서 가람은 늘 그 찌푸려진 낯짝이 역겨웠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웃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제 앞에 닥친 위험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그 멍청한 꼴이 무척 웃겼기 때문이다.

청가람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남자답게 쭉 뻗어있는 턱선이 손 안에서 콱 짓눌러진다.

이야기들었어. 주작후계와 함께 하늘나라로 가지 않을 방법을 찾고 있다며?
뭐하러 어려운 길을 찾아. 내가 그 소원 들어줄게.

실제로 그 대목에서 청가람은 활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자기를 수련장 구석에 쳐박고 여의주로 만든 검을 차갑게 겨누며 지껄인 말들을 그대로 되둘려주는 감각은 도저히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을만큼 황홀했던 것이다.

무술을 할 수 없는 몸으로 만드는 건 쉬우니까.

그제야 적의를 눈치챈 그가 이를 악물며 손을 뿌리쳤다. 가람은 순순히 물러났다. 턱뼈를 부숴 평생 그 사랑하는 여자에게 미음이나 받아먹는 처지로 만드는 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역시 그렇게 간단히 끝내주기는 아까웠다. 그가 할 수 있는 만큼 필사적으로 발버둥쳐준다면 고맙겠다. 그래야 아무리 덤벼도 넘을 수 없는 차이에 절망하는 기분과 스스로의 무능력에 절규하는 감각을 그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배에 손을 대더니 여의주를 뽑아냈다. 구형의 푸른 신물은 곧 날렵하게 쭉 뻗은 청룡검이 된다. 그 모습만은 기억과 똑같아서 가람은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여의주로부터 창을 뽑았다. 그가 몹시 익숙한 자세로 검을 휘둘렀다. 하품이 나올 만큼 느리기 짝이 없었다. 간단히 옆으로 몸을 돌려 검날을 피하면서 이번엔 가람이 크게 반원을 그리면서 창을 휘둘렀다. 원래 무기는 길이가 긴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심지어 과거에도 그 길이의 차이 때문에 그는 손쉽게 검을 뺏겼었다.

이번엔 그 정도도 합을 주고받지 못했다. 창의 범위에서 화급히 물러나는 그 동작마저 굼떠 창날에 앞머리와 코끝이 걸려 쭉 찢어졌다. 집중력이 흐트러진 사이 창날 틈에 검을 끼워 빼앗는 것은 애들 장난처럼 간단했다. 구태여 창을 내던질 필요도 없었겠지만 가람은 예전처럼 창과 검을 함께 내던졌다. 그 편이 훨씬 몰입이 잘 되기도 했고, 주먹으로 후드려패는 쪽이 실감날 것 같기도 했다.

청룡신령은 하나뿐이다. 그 청룡이 가람의 몸에 묶여있었으므로, 그는 가람의 주먹을 피하지 못했다. 덜 자란 채로 멈춘 가람과 달리 충분히 성장할 시간이 있었던 그는 가람의 손에 묵직한 타격감을 남기며 볼썽사납게 뒤로 날아갔다. 기와 담장에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고 요란했다.

가람이 깔끔한 마무리를 위해 잔해더미를 향해 다가가던 중간이었다. 가람에게 임해있던 청룡신령이 훅 꺼졌다. 잔해에서 청룡을 이고 몸을 일으키는 푸른 머리의 그가 이를 으득 깨물며 말했다.

전세역전이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가람은 팍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배를 구부리고 깔깔 웃었다. 어디까지 그가 날 즐겁게 만들어줄 셈인지 상상도 안갔다. 동시에 조금 소름끼쳤다. 이렇게까지 닮아있다는 건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불쾌하기 짝이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거야?

그래도 가람은 한명의 희극배우처럼 제게 주어진 진부한 대사를 주워섬겼다. 조금 기운을 집중하자 어설프게 잡아두고 있는 청룡강림의 허점이 보였다. 한군데만 톡 건드려주자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진다. 다시 온몸에 신령의 기운이 뿌듯하게 들어차는 감각이 느껴졌다. 가람은 걸음을 옮겼다.

서있는 것도 힘들지? 운명의 수련이 부족해서 신령을 잡아두는 힘이 약해서 그래.

아, 그 눈. 절망하는 눈. 검게 죽은 시선이 가람을 참을 수 없게 만든다. 가람은 여의주를 도로 불러내 아까 내던진 창으로 바꾸었다. 손 안에 착 감기는 창을 반 바퀴 돌려 역수로 쥐고 주저앉은 그의 무릎 언저리를 겨누었다. 관절은 쉽게 아물지 않는 법이다. 이제 그의 얼굴에 물들어있는 감정을 공포가 아니라고 변명하긴 어려울 것이다. 가람은 자신이 이 순간을 보기 위해 그 긴 치욕 끝에 살아남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오늘처럼 생명이 뿌듯한 적이 없다.

뭘 겁내. 당신이 목숨 걸 만큼 사랑하는 여자라면 다리 하나쯤 없다고 당신을 버리진 않을텐데.

아니면 설마 자신없는 거야? 가벼운 투로 흥얼거리는 가람을 노려보며 그가 마지막 유언같은 말을 내뱉었다.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지. 가람은 무척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명랑한 웃음을 와하하 터트렸다. 그리고 마침내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어요.

잘가요. 아빠.

예리한 창 끝이 지겨운 운명을 콰직 박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