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건은찬:조별과제

교양 하나를 완전 잘못 골랐다. 정정기간에 학점을 채우기 위해 어거지로 빈 시간에 끼워넣은 수업이 하필 실라버스에 대놓고 조별과제 40%라고 적혀있는 수업이었을 건 뭔가. 전공도 모자라 교양에서까지 사람들 챙겨가며 씨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찔하다. 중간 변경기간에 급히 바꾼 수업이라 오티는 못왔는데 그 첫시간에 벌써 조편성이 끝났던 모양이다. 교수는 강의를 마치고 백건처럼 중간에 추가된 학생들을 불러 적당히 남는 조에 끼워넣었다. 사회학과 15학번 홍수아, 디자인학부 18학번 유나비, 컴퓨터공학부 17학번 주은찬. 참 골고루 모였다. 제 위에 써진 이름과 학과, 학번 따위를 시선으로 가볍게 훑으면서 백건은 낮은 한숨과 함께 그 아래에 자기 이름을 써넣었다. 경영학과 17학번. 백 건.

간단히 기재하고 몸을 돌리는데 불쑥 낯선 얼굴이 눈앞에 끼어들었다. 붉은 끼가 감도는 머리카락과 적당히 눌러 쓴 스냅백. 귀에 박힌 붉은 원석 귀걸이. 요란한 차림을 한 남자애였다. 눈이 마주치자 살갑게 웃으면서 핸드폰을 내민다.

"3조 맞지? 같은 조인 컴공 17 주은찬이야. 번호 좀 찍어줘."


서넛이 모이면 한 명 쯤은 조장 노릇을 하게 되기 마련이다. 이번에는 아마도 그게 얘였던 모양이다. 백건은 순순히 내민 핸드폰에 꾹꾹 번호를 찍었다. 백 건. 습관적으로 외자 이름 앞에 띄어쓰기 한번 찍고 돌려주었다. 영 미덥지 않은 타입이지만 원하지 않는 총대를 떠맡는 것보다야 백 배 나았다.

"이따 내가 단톡방 만들게. 잘부탁해."


원래 성격이 그렇게 스스럼없나. 마치 오래 알아온 친구처럼 어깨를 두드리고 씩 웃더니 가벼운 걸음으로 먼저 강의실을 빠져나간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다지 맘에 드는 첫인상은 아니었다. 백건은 저런 종류의 사람이 얼마나 피곤해질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주은찬이 두드리고 간 어깨를 잠시 내려다보다 백건은 이내 백팩을 어깨에 둘러맸다.

뭐, 미리 걱정을 사서 할 필요는 없겠지.

-

그리고 문제는 완전히 다른 데서 터졌다.
영 미덥지 못했던 첫인상에 비해 주은찬은 기대 이상으로 제 역할을 해내는 편이었다. 먼저 단톡방을 열고 영 대답이 뜸한 나머지 두 여자애들ㅡ사회학과, 디자인학부 모두 여자였다.ㅡ을 적당히 구슬려 회의를 이끌어 나간 것도 그였다. 취업반인 사회학과는 바쁘다면서 자꾸 투덜거렸고 디자인학부의 신입생은 시덥지도 않은 잡담만 해댔지만 주은찬은 제법 요령좋게 둘의 비위를 맞춰가며 일을 진행시켰다. 분담하는 것까지도 순조로웠다. 디자인학부 신입생이 대뜸 자신있게 PPT를 맡겠다고 나섰고 사회학과는 처음부터 발표는 절대 싫다고 주장해 은찬과 함께 자료조사를 하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발표는 백건의 몫으로 돌아왔다. 미리 내용을 숙지하고 대본도 작성해야 하니 일주일 전까지 정리된 자료와 PPT를 받기로 했다. 거기까진 다 괜찮았다.

제 시간에 도착하기만 했다면 완벽했을 것이다.

시간에 맞춰 도착한 메일은 주은찬이 맡은 분량의 자료 뿐이었다. 사회학과는 며칠 전부터 카톡 확인 조차 안하고 있었고 디자인은 며칠을 닥달했더니 그제야 남의 핑계를 댔다. 언니가 자료를 안보내줘서 못했어요. 그러면 주은찬의 자료만이라도 PPT로 만들었냐고 물으니까 역시 씹는다.

그 지지부진하고 영양가없는 씨름을 하면서 나흘을 날렸다. 발표는 내일 모레, 완성된 자료도 PPT도 없다. 원래부터 촉이 안좋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이렇게 뒤통수를 맞으니까 짜증이 난다. 이러니까 조별과제가 싫은 것이다. 차라리 혼자하는 게 훨씬 낫지. 이마가 지끈거린다. 백건은 결심했다.

그냥 개인과제인 셈 치자. 이틀 밤 새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백건은 얼어죽은 단톡방 대신에 다른 카톡방을 열었다. 주은찬과의 개인카톡방이다. 일단 조사했던 자료 간추린 버젼 말고 최대한 전부 보내달라고 할 셈이었다. 분량을 나누긴 했어도 완전히 무관한 내용은 아니니까 바탕으로 어떻게 해봐야지. 도서관에서 관련 서적 몇 개 빌리고, 논문 좀 찾아볼까. 카톡의 1은 금세 사라졌다. 도서관 로비를 걷고 있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메일로 보냈다는 카톡이겠거니 생각하며 핸드폰을 열었는데 아니었다. 전화였다.

ㅡ 음, 건아. 너 자취해?

태평하고 필요 이상으로 친근하게 구는 목소리. 뜬금없이 던지는 화두. 통통 튀는 말투.
백건은 어쩐지 긴장된 어깨에서 힘이 쭉 빠지는 걸 느꼈다.

-

기껏 빌려온 관련 서적과 논문들을 펼쳤지만 영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백건은 어쩐지 안절부절했다. 지금껏 같은 과 동기조차 자취방에 들인 적이 없었다. 원래부터 개인 공간에 사람들 들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근처에서 자취한다는게 알려지면 대단히 피곤해진다고 들어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심지어 짧게 만나다 지난 학기 종강할 무렵 헤어진 여자친구조차 초대한 적이 없었는데.

뜬금없는 주은찬의 물음에 부정할 타이밍을 놓친 것이 화근이었다. 어차피 우리 밤새야 할 것 같은데 그럼 하룻밤 신세져도 될까? 네이트온보다 같이 앉아서 하는 쪽이 훨씬 빠를 거고. 노트북 가져갈게. 거기에 대고 역시 안된다는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데려오면 잠은 어디서 재우지. 침대는 하나 뿐인데. 소파는 솔직히 자기에겐 너무 짧았다. 그렇다고 손님을 소파나 바닥에서 재우는 것도 좀. 아, 우리 자면 안되는 구나.

ㅡ띵동.

그런 식으로 생각이 잔뜩 뒤엉킨 복잡한 머리로 백건은 문을 열었다. 오늘은 스냅백 대신의 챠콜색의 비니. 편하게 걸친 맨투맨 티는 전에 수업에서 봤을 때보다 단정하고 덜 튀었지만 여전히 도서관보다 홍대 앞 거리에 어울리는 모습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가을 밤바람이 쌀쌀했는지 코끝이 비니 밑으로 삐죽 나온 붉은 머리카락만큼이나 빨갰다. 그런 얼굴로 주은찬은 자신을 올려다보며 실없이 활짝 웃었다.

"하하, 건아.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내가 간식 좀 사왔어."

그제야 양손에 들린 엄청난 부피의 봉투가 보여 백건은 질린 얼굴로 두어걸음 비켜섰다. 그러자 마치 제 집인양 스스럼없이 운동화를 벗고 성큼성큼 들어선다. 부엌이 저 쪽이야? 분명히 처음 왔을텐데 여러번 와본 마냥 익숙하게 냉장고 문을 열고 캔음료같은 것들을 잔뜩 채워넣는다. 자세히 보니 죄다 핫식스다. 다른 봉투에서는 과자, 오징어, 컵라면, 데워 먹는 즉석식품같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걸 오늘 밤에 다 먹으려고?"

백건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느새 뜯은 건지 마른 오징어 다리 하나를 입에서 질겅이며 냉장고를 뒤적이던 은찬이 그 말에 실실 웃었다. 으음, 내가 야참 없으면 밤을 못새서.

"아, 노트북은 어디서 하면 돼?"

그래도 지나치게 양이 많지 않냐고 되물으려다가 시시한 일에 너무 집착한다는 자각이 들어 백건은 말없이 은찬을 거실로 안내했다. 소파와 벽에 걸린 티비, 커다란 원목 테이블을 보던 은찬이 순수한 감탄을 뱉었다. 부자라고 소문났다더니 진짜인가보네. 백건은 대답 대신 머쓱하게 뒷목만 매만졌다. 뒤에서 그다지 친하지 않은 동기들이 백건의 옷, 시계, 노트북, 차 따위를 보고 수군거린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얘기하는 건 처음 봤다. 기분 나빠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주은찬은 벌써 테이블 한쪽 끝에 부산스럽게 노트북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어쩐지 화낼 기분도 들지 않는다. 가볍게 바람빠지는 것처럼 픽 웃음이 샜다.

빌려온 책과 논문은 테이블 중간에 잔뜩 쌓아두고, 양쪽 끝에는 각자 노트북을 펼치고 마주 앉았다. 그래서 자판을 두드리다 고개를 들면 화면에 열중한 얼굴이 슬쩍슬쩍 보였다. 
분담은 빨랐다. 자료 남은 건 둘이 나눠서 후딱 정리해 취합하고, 그걸 은찬이 PPT로 만들기로 했다. 그러면 백건이 발표 내용을 정리하면서 내용을 숙지하는 것이다. 뭐, 나비처럼 예쁘게 만들 자신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내가 빠르지 않을까? 하핫. 그 말에 새삼 떠올렸다. 아 쟤 컴공과였지. 확실히 이리저리 프로그램을 다루는 폼이 능숙해보이긴 했다.

그래도 잘 매칭이 안됐던 건 역시 주은찬의 차림새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으레 공대하면 연상되는 이미지들과 주은찬은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촌스러운 체크남방이나 두꺼운 안경이나 뭐 그런 것들. 오히려 디자인학부라고 하는 쪽이 훨씬 납득하기 쉬웠을 것이다. 쨍하게 염색한 머리, 귓볼에 박힌 붉은 원석 귀걸이 역시 예체능하는 애들 특유의 개성이라고 말하면 이해하기 편했겠지. 날렵한 얼굴과 입술 옆에 유난히 눈에 띄는 점도 주은찬을 남달라보이게 만든다.

주은찬을 특별하게 만든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건아."

그렇게 무심코 주은찬을 관찰하다가 문득 이름이 불렸을 때 백건은 제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랐다. 물처럼 들이킨 핫식스 때문인지 심장이 사정없이 쿵쾅거렸다. ㅇ, 왜? 꼴사나운 대답이 튀어나갔다. 백건은 그대로 키보드에 머리를 박고 싶어졌다.

"응? 아니. 정리한 거 보내준 거 지금 읽어보는데. 되게 꼼꼼히 했다. 대단하다 싶어서."

주은찬은 언젠가 핸드폰을 내밀며 번호를 물었을 때처럼 살갑게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백건은 뭐, 그냥. 하며 어물쩡 대답을 흐렸다. 바라는 것이 뚜렷하지 않은 이런 류의 칭찬에 그는 면역이 없었다. 백건이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 은찬이 태연하고 친근한 투로 사근사근 말을 잇는다. 나는 말야, 좋아하는 건 확실히 완벽하게 하고 싶거든. 하지만 별로 안좋아하는 일은 솔직히 요령껏 구색만 맞춘단 말야. 그런데 건이 너는 참 성실한 것 같아서.

"그게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

나는 솔직히 수아 누나랑 나비 그렇게 잠수탔을 때, 그냥 될 대로 되라 싶었는데. 건이 너는 끝까지 포기하지도 않고. 지금도 이렇게 열심이고. 하핫. 사실 네가 혼자 해보겠다고 나한테 카톡하지 않았으면 나도 그냥 모른 척 했을 것 같은데. 건이 네가 그러니까 나도 어쩐지 힘내야겠다 싶어져서….

조잘대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백건은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있던 어깨를 조금 늘어트렸다. 주은찬과 같은 종류의 사람이 얼마나 그를 피곤하게 만들 수 있는지 백건은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은 두드려보고 열리지 않는다 싶으면 그냥 돌아가는 벽을 아무렇지 않게 허물고 들어와 휘젓고 휘두르거든.

실시간으로 무장해제 당하는 기분을 느끼면서 백건은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아, 큰일났다.

지금 완전히 반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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