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찬_후각의 상실

이따금씩 코 끝에 오래 머물렀다 사라지는 잔향을 알아챈 것은 아마, 중 2의 가을이었을 것이다. 중 3이었을 수도 있고. 어쨌든 학교에서 단체로 나갔던 소풍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애초에 동물원같은 곳에 내가, 자발적으로 갔을 리 없다. 바위 위에 늘어져있던 백호랑이. 그 우리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던 기억이 난다. 호랑이라는 이름에 묘한 환상을 품고 몰려왔던 또래애들은 진작 시끄럽게 떠들며 또다른 동물 우리로 몰려간 뒤였다. 소리를 질러도 반응도 없고 먹이를 직접 먹여줄 수도 없는 백호보다 손에서 넙죽넙죽 바나나를 받아먹는 원숭이가 재밌긴 했을 것이다. 백호는 고작 죽은 것처럼 한참 엎드려있다가 이내 한번씩 하품이나 해대고, 커다란 뒷발로 슬슬 귀나 긁어대는 것이 다였으니까. 나 역시 그 게으른 꼴이 재밌다거나 흥미로워서 남아있었던 것은 아니다. 걸음을 붙들었던 것은 차라리 일종의 강박에 가까웠다.


나의 태몽은 백호였다.


엄마가 가장 먼저, 다음은 아빠와 할머니, 심지어 막내고모까지 꿨다던 내 태몽은 하나도 빠짐없이 죄다 그 흰 털의 호랑이였다. 나는 그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다. 친척들 모두 영물을 태몽으로 삼아 태어난 아들에 대해 기대가 아주 지대했다. 넌 큰일을 할 거야. 어깨를 두드리는 손. 그런게 익숙하다 못해 지루해질 만큼. 중 2의 혹은 중 3의 나는 그래서 좀 궁금했던 것 같다. 대체, 그놈의 백호가 뭐라고. 그런 삐딱한 기대로 철망 너머의 대호를 한참 노려보는데, 놈이 갑자기 포갠 앞발 위에 괴어두고 있던 고개를 문득 쳐들었다. 가볍게 부르르 머리를 털더니 이내 슬쩍 시선의 방향을 튼다. 그게 하필 내가 선 방향이라 무심결에 두어걸음 뒷걸음질쳤다. 타이밍 좋게, 백호가 어금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니, 으르렁대는 것처럼도 보였다. 목덜미가 선뜻해 괜히 축축해진 뒷목을 문질렀다. 손에 찬 땀이 묻어났다. 그대로 우리 앞을 벗어나려는데 그때까지 눈에 띄지도 않았던 안내판이 시선에 걸린다. 의식하기도 전에 적혀있는 활자가 눈에 박혔다.

「…호랑이는 야콥슨 기관을 통해 사람들이 맡지 못하는 여러 가지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암컷의 발정 냄새 등 다른 동물들이 풍기는 미묘한 냄새를 구별하는 것이다. 이 기관을 이용하여 냄새를 맡을 때에는 입을 벌리고 입술을 말아올리는 동작을 취하는데,

꼭 웃는 것처럼 보인다.」

직전에 본 백호랑이의 표정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다시 돌아보자 이미 호랑이는 도로 제 앞발 위에 엎드린 채였다. 하지만 한번 강하게 박힌 이미지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무심코 머릿속에 가득 차오른 이미지를 떠올리며 입술 끝을 당겼다. 

그리고, 맡았다.


야, 빽건!


목을 조르며 매달리는 무게감과 함께 콧속에 눌러붙을 것 처럼 달짝지근하고 어딘지 시큼한 냄새가 등뒤에서부터 훅 끼쳐왔다. 순간 머리까지 어찔해질 지경이었다. 핑 도는 어지러움에 다리가 풀려 풀썩 주저앉았다. 주은찬은 제가 목을 조르는 장난을 치는 바람에 그런줄 알았는지 깜짝 놀라며 내 팔을 붙들었다. 뭐야 백건, 평소에는 끄떡도 없더니. 어디 아파?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걱정이 녹아 있었다. 나는 그 익숙하기 짝이 없는 못생긴 낯짝을 한참 올려다보다 대답대신 팔을 뻗었다. 교복자켓을 잡아당기자 순순히 끌려오는 몸. 별 생각도, 어떤 악의도 없이 나는 가까이 코끝을 들이밀었다. 이상해 주은찬. 너한테서 좋은 냄새 나.

그러나 다음 순간 유독 조용해진 주은찬을 올려보았을 때,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대로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귓볼, 목덜미 따위가 두서없이 시야에 쏟아져 들어왔다. 입매를 더 당긴 것도 아닌데,그대로 숨막혀 죽을 수 있을 것처럼 냄새가 진해졌다. 주은찬이 손바닥으로 내 이마를 밀어냈다. 시야에 손바닥이 가득 들어차고 맥박치는 손목이 코끝에 아슬하게 걸렸다.


…무,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저리 비켜!

스치듯 닿은 살결때문에 주은찬의 심장뛰는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고동칠 때마다 주은찬에게서 풍기는 냄새도 짙어졌다. 도저히 정체를 모르겠다고 생각하자마자 얼핏 보았던 안내문의 문구가 기다렸던 것처럼 툭 떠올랐다.


암컷의 발정 냄새.


나는 그날, 주은찬의 비밀 하나를 알게 되었다.


-


한번 개화한 감각으로 봇물터지듯 냄새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 냄새가 꼭 주은찬에게서만 풍기는 건 아니었다. 종종 길을 걷다 스치는 사람에게서, 혹은 자주 마주치던 학원의 여자애에게서도 냄새는 풍겼다. 사람마다 옅거나 짙은 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공통점은 분명하다. 나를 원하는,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나와 섹스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이 감각때문에 내 일상에는 몇가지 변화가 생겼다. 원래도 사람많은 곳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냄새를 맡게 된 이후로는 정말 기를 쓰고 피하게 됐다든지 하는 것들. 이따금 냄새에 질식할 것처럼 파묻힌 날에는 두통을 앓기도 했다. 관자놀이 언저리가 띵하고 어지러운 쨍한 통증. 덕분에 종종 걷다가 이마를 감싸고 인상쓰는 습관도 생겼다. 그러면 대개의 경우 같이 걷고 있던 주은찬은 함께 걸음을 멈추곤 내게 다가와 걱정스런 얼굴로 올려다보면서 묻는다. 야, 백건. 괜찮아? 사실은 누구보다 가장 진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주제에.

놀랍게도 주은찬과의 관계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나는 주은찬이 나를 반찬삼아 자위할 것이라는데는 얼마든지 돈을 걸 수 있었지만, 그걸 불쾌하게 느껴 주은찬을 멀리 해야겠다거나, 혹은 그 성애를 받아줘야겠다거나 하는 생각들은 전혀 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이 상태, 이대로가 나는 제법 맘에 들었다.오래 알아온 시간만큼 주은찬은 죽이 잘맞는 좋은 친구였다. 내 변덕이나 심술에도 이미 익숙해서 편했고, 편리했다. 주은찬은 달갑잖은 관심들로부터 나를 차단할 수 있는 방패도 되었고, 내가 아주 겉돌지 않도록 붙드는 끈이 되기도 했다. 나는 그런 주은찬을 버릴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게다가 주은찬은 애초부터 자기의 날감정을 드러내며 받아달라고 강요하는 타입은 못됐다. 그 점이 가장 중요하다. 주은찬에겐 제 손으로 나와의 친구관계를 끝장낼 위험을 무릅쓸 수 있을만한 배짱이 없었다. 그러니 관계의 주도권은 내게 있다. 내가 먼저 까발리기 전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내가 바라지 않는다면 경험한 적 없는 영역에 대해 으레 갖게 되는 막연한 혐오감을 무릅쓸 필요도, 주은찬과의 관계를 일부러 끝장낼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나는 특히 그 부분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관계의 칼자루를 내가 쥐고 있다는 것.


정작 받아줄 생각은 없으면도 일부러 주은찬에게 더 치댔던 것도 다 그런 감정에 기인한 것이다. 빨리 가자며 손을 잡아채거나 어깨 위에 팔을 두르거나 얼굴을 가까이 들이댈 때마다, 어떤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새빨개지는 얼굴과 동시에 강해지는 냄새. 그 즉각적인 반응들을 나는 즐겼다. 웃겼다. 짜릿하고 재미있었다. 주은찬의 머리 꼭대기에선 것처럼 우월감이 느껴졌다. 고작 내 몸짓 하나에, 다정을 가장한 상냥한 말 한 마디에 주은찬은 수면에 돌을 맞은 호수처럼 일렁거리곤 했다. 그 파문을 관찰하는 일이 그 시절 나의 주요한 취미였다. 그 취미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깜빡하고 있었다. 


주은찬이 호수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하교하던 길이었을 것이다. 방학이 머지 않아 입김이 서리던 찬 공기가 기억난다. 여름에 태어나 그런지 주은찬은 유난히 추위에 약했다.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다 보면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은 채 추위를 불평하는 웅얼거림이 들리곤 했다. 아, 대박 춥다. 죽겠네 진짜. 나는 익숙한 투덜거림을 적당하게 받아넘겼다. 그러게. 옆에서 슬쩍 올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
런 자잘한 신호들을 무시하는 일에 나는 익숙했다. 주은찬이 목도리에 한층 더 깊게 얼굴을 파묻는다. 신호가 바뀌었다. 먼저 발을 떼는 것은 언제나 내쪽이다. 한발 늦게 주은찬이 발을 재게 놀려 따라붙었다. 파란불이 깜빡이고 횡단보도를 거의 다 건너왔을 무렵, 주은찬이 문득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방금 걔, 옆반 반장인데. 봤어? 나는 그제야 인도에 올라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색깔의 교복치마를 입은 긴 머리의 여자애가 팔랑팔랑 멀어지고 있었다. 아, 그래? 무성의한 대꾸. 당연히 알 리가 없다. 주은찬은 한번 더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성큼 앞서걷기 시작했다. 다 안 감긴 목도리가 등 뒤로 늘어졌다. 드리운 낚시대처럼.

나, 쟤한테 고백해볼까.

붉어진 귀끝이 꼭 추위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옆구리도 시리고. 괜히 자신이 없어 기어들어가는 웅얼거림. 걸음이 느려지다 점점 멈추고 주은찬은 공연히 마른 바닥만을 걷어찼다. 그 속이 맑은 개울물처럼 빤하게 들여다보였다. 아마 벌써 스스로도 후회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나는 괜히 여자애가 사라진 길 너머를 한번 돌아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저절로 웃음이 샜다.

떠보는 것이다. 

주은찬 주제에.

아, 걔 나랑 잤었는데. 나는 무신경한 거짓말로 주은찬을 후볐다. 정말로 웃긴 부분은 아까 스친 여자애에게서도 희미한 냄새가 풍겼다는 사실이다. 
지금껏은 관심도 없고 이름도 몰랐다지만, 글쎄, 작정하면 짧으면 이주, 길면 한달안에 나는 그 애의 속옷을 벗길 자신이 있었다. 나쁘지 않더라. 뭐, 한번 해보든지. 태연한 목소리로 덧붙이며 나는 다섯 걸음쯤 떨어진 주은찬과의 간격을 성큼 좁혔다. 굳어있는 어깨를 슬쩍 두드려 주다가 픽 웃음이 샜다. 아주 질 나쁜 3류 코미디를 눈앞에서 관람하는 것만 같았다. 그때 주은찬의 얼굴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아무리 실망시키고 기대를 무너트리고 낙담시켜도. 알게 모르게 무시하고 냉대해도. 항상 어설픈 미소나마 걸려있던 주은찬의 얼굴 위에서 표정이 탈색되는 순간. 그 순간에 나는 말로도 다 표현키 어려운 쾌감을 느꼈다. 저열한 우월감이 발끝부터 저릿하게 차올랐고, 그 어느 때보다도, 완벽하게 주은찬을 소유한 기분이 들었다. 


완전히 무너트려 조각난 상태의 주은찬을.


입술을 무심코 좀 더 끌어올리자, 사방에 진동하는 주은찬의 냄새가 보다 선명하게 감각기관을 뒤흔들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내게 안기고 싶어 안달나 있으면서. 무슨 수로 다른 사람에게 고백하겠다는 건지 웃기지도 않았다. 나는 다시 주은찬을 지나쳐 앞서 걸었다. 뒤따라오는 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걸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주은찬은 겨울방학이 지나고 돌아오지 않았다.
칼자루가 내게 있다고 믿었는데. 주은찬은 칼째로 버려버렸다. 전부 가졌다고 느낀 순간, 전부 손가락 사이로 사라져버린다.

주은찬은 
도망친 것이다.
나로부터 혹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

솔직히 말하자면,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다.
배신감과 패배감, 허탈함과 뒤늦은 아쉬움 따위가 차례로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쓸려가기를 반복하면서 십년이 지났다. 나는 새로 열린 감각에 익숙하다 못해 무뎌졌고, 점점 지겹고 끔찍해졌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던지는 추파와 애욕 따위에 넌덜머리가 났다. 백건 씨는 도통 웃는 일이 없네.
 그런 불평에도 익숙해졌다. 문제는 입술을 말아올리지 않아도 냄새가 완전히 차단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덕분에 추위를 잘 타지도 않으면서 주은찬과 비슷한 습관 하나가 생겼다. 날씨가 조금만 싸늘해진다 싶으면 목에 목소리를 칭칭 감고 거기에 코를 파묻는 것이다. 그러면 좀 덜했으니까.

라리 감각이 거세되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얼굴을 목도리에 좀 더 깊게 파묻고 걷고 있던 중이었다.

주은찬을 다시 만난 것은.

시선 끝에 성가시게 걸리는 붉은 머리카락. 처음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뇌이면서도 나는 걸음을 멈췄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옆사람 팔을 퍽퍽 치면서 웃고 있었다. 굽힌 허리를 펴자, 익숙한 듯 나이를 먹은 얼굴이 잘 보였다. 정말 주은찬이었다. 나는 얼굴을 반쯤 파묻고 있었던 목도리에 손을 걸어 끌어내렸다.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치고 멀어졌다가 바람과 함께 밀려왔다. 정말로 아주 오랜만에 나는 입술 끝을 당겼다. 얼굴만큼이나 익숙한, 그 짙고 진한 냄새를 기대하면서.

차가운 바람이 내 기대를 저버리며 뺨을 치고 지나갔다. 이상했다. 예전에는 주은찬이 멀리 있어도 바람이 불면 꽃향기처럼 짙은 냄새가 훅 끼쳐 밀려오곤 했었는데. 지금은 골목에 모여서서 나를 흘끔거리는 여자들에게서 풍기는 얄팍하고 천박한 호기심만이 조금 맡아질 뿐이다. 나는 인상을 가볍게 찌푸리면서 이마를 문질렀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제 더 이상 괜찮냐고 물어봐주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빈 자리에 무뎌진지 오래되었는데, 오랜만에 주은찬을 마주쳤기 때문일까 옆을 스치는 바람이 유난히 차가웠다. 찡그린 시야에 주은찬이 뒤를, 나를 향해 몸을 돌리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여전히 입가에 점과 웃음을 매단 얼굴이 똑바로 날 향했을 즈음엔, 달음박질하는 것처럼 쿵쿵 뛰는 심장박동이 귓가에 먹먹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선은 내게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슥 지나간다. 금세 도로 돌아간 낯짝은 제 옆에 선 다른 사람을 향해 또 웃고 있다.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파도처럼 고막에 울리던 박동소리마저 순식간에 잦아든다. 역시 뭔가 아주 잘못되었다. 주은찬과 나는 한번도 이런 방향의 관계였던 적이 없었다. 주은찬이 날 무시한다니 말도 안된다. 왜냐하면, 주은찬은. 엉망진창이 된 머리속을 다 정리하기도 전에 지인들과 어울리고 있던 주은찬이 이내 인사를 주고받더니 반대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번에 놓치면 아마 또 십년을 기다리게 될지도 모른다. 비참하고 초조한 심정으로 나는 재게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늘어난 인파에 가로막혀 붉은 머리카락이 사람의 파도 너머에서 들쑥날쑥 했다. 나는 어깨를 밀치며 빠르게 걷다가 종내에는 뛰었다.

주은찬!

손을 붙들어 걷던 걸음을 확 돌려세운다. 비명처럼 이름을 불렀다. 십년동안 하루도 잊어본 적 없는 얼굴을 코앞에 둔 채로 나는 거의 헐떡이고 있었다. 찬 공기를 급하게 들이마신 폐가 따갑게 쑤시고 아렸다. 주은찬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이내 끄트머리를 예쁘게 접으면서 활짝 웃는다. 백건? 진짜 백건이야? 와, 이렇게 마주치네. 반가워하는 반응에 일단 안도가 들었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주은찬이 날 외면할 수 있다니 정말이지 말도 안된다. 왜냐하면, 주은찬은 날.

그 때 꽉 잡은 손아귀 안에서 나는 이상한 감촉을 느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주은찬은 장갑조차 끼지 않은 맨손이었는데 차갑고 딱딱한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에 배기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나는 놓치지 않으려 힘주어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 그리고 단정한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했다. 내 시선을 눈치챈 주은찬이 조금 멋쩍고 머쓱한 웃음을 지으면서 입을 연다.

아, 건아. 나 결혼했어.

왜냐하면, 주은찬은 날.
…날 좋아하는데.

-

발버둥치는 몸을 찍어눌렀다. 뜨겁고 좁았고 아팠다. 쾌감보다는 얼얼한 통증에 가까웠다. 빈말로도 좋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주은찬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머리를 바닥에 짓눌린 채로도 악을 쓰며 욕을 했다. 나중에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 바들바들 버텼다. 신기하게도 끝까지 울지는 않았다. 울었던 것은 내쪽이었다.

주은찬, 너 나한테 발정했잖아. 내게 안기고 싶어서 안달나있었으면서.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배신감과 패배감, 허탈함과 뒤늦은 아쉬움들이 차례로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쓸려간다. 비참한 기분을 통째로 삼키면서 나는 주은찬의 맨등에 뚝뚝 눈물을 떨궜다. 억울했다. 원망스러웠다. 주은찬이 밉고 증오스러웠다. 차라리 그날처럼 전부 부서진 채로 내 손안에 남아있어주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침내 마찰하는 감각에 의존해 어찌어찌 절정까지 이르렀을 때, 주은찬은 기절했다. 마지막까지 애를 써 달아나려고 했던 몸이 내 아래에서 힘이 빠져 축 늘어진다. 나는 눈물과 땀으로 온통 젖은 그 등 위로 몸을 숙이고, 흰 목덜미 위에 코를 부볐다. 오로지 체취만이, 살내음만이 맡아졌다. 비릿한 냄새가 온 사방에 진동을 하는데도, 내가 끝끝내 기다려온 그 냄새만큼은 조금도 풍기지 않는다. 가장 끔찍한 기분으로 숨을 몰아쉬다가 마침내 한 결론에 다다랐다.

내가 어딘가 망가진 게 틀림없다.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던 말 그대로, 정말 감각이 거세당하기라도 했나보지.
그게 아니면 조금도 맡아지지 않는 냄새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주은찬이 내게 발정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 안그래?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다만 모래 속에 머리를 쳐박는 타조처럼 주은찬의 기절한 몸에 얼굴을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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