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건은찬:데이트

솔직히 따지고 보면 많이 바뀐 것은 없다.
8년을 알아온 취향은 뻔할 만큼 익숙하고, 서로가 어디에 있을 때, 무엇을 할 때 가장 즐거운지 알고 있다. 좋아하는 음식 취향은 이미 외웠고 어떤 자리를 불편하게 여기고 어디를 좋아하지 않는지 역시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일견, 우리의 데이트는 그간 줄창 함께 놀겠다고 쏘다니던 날들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어보였다. 다만, 데이트라는 단어 자체가 조금 간지러웠을 뿐이다.

은찬은 조금 노릇하게 익어가는 고기를 익숙하게 뒤집었다. 함께 온 곳은 중앙에 온 뒤로 청가람의 눈을 피해 외식할 때마다 왔던 단골 고깃집. 찬바람 때문에 빨개진 얼굴로 들어서자 주인 아주머니는 잘생긴 총각들 또 왔네 그러면서 반갑게 맞아준다. 둘이 진짜 친한 친구인가봐~ 늘 매일 붙어다니고. 아주머니는 고기와 쌈 채소 등 상을 차려주며 살갑게 말을 건넸다. 은찬은 늘 습관처럼 짓는 가벼운 웃음으로 대답을 때웠다. 그래, 누가 봐도 연인보단 친한 친구처럼 보일 것이다. 서운하다 느끼기도 민망했다. 사실 은찬 자신도 아직 실감이 나질 않았다.

지금 이 징그러울만큼 익숙한 얼굴로 꾸역꾸역 고기를 씹고 있는 백건과 자신이 연인이라는 게.

우리는 오랫동안 아는 척, 모르는 척 서로를 떠보고 눈치를 살피면서 제자리걸음해왔다. 생각해보면, 자잘한 징조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데. 전부 혼자 마신 김칫국에 착각이 될까봐 무섭고 비참해서 은찬은 일부러 필사적으로 모른 척 했었다. 사소한 설렘에 기대 발을 디뎠다가 전부 와르르 무너지면 안되니까. 소꿉친구와 우정으로 포장한 시간과 추억과 감정들이 벌써 8년만큼 쌓여있는데.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더 많은 것을 꿈꾸고 바랄 용기가 은찬에게는 없었다. 자신만을 끊임없이 억누르고 타일렀을 뿐이다. 괜찮아, 친구로도 만족할 수 있어.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백건이 좋아하는 애가 있다고 말문을 열었을 때 깨달았다. 몇번이나 혼자 속으로 상상했던 장면이었다. 언젠가는 건이에게도 잘나고 예쁜 여자친구가 생기겠지. 그래서 친한 친구라는 이름으로는 기대할 수 없던 일들을 그 애에게 해주겠지. 그러면 은찬은 장난스레 웃는 얼굴로 등짝을 퍽 치면서, 빽건 드디어 모솔 딱지 뗐다며 축하해주는 것이다. 가장, 친한 친구니까.

그렇게 여러번 다짐했는데, 정작 들었을 땐 그대로 머리가 하얗게 표백되는 기분밖에는 들지 않았다. 축하는 커녕 질투와 시기로 속이 꼬여서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새삼, 와 내가 이렇게 백건을 좋아하는구나. 싶어져서 비참하고 서럽고. 그 와중에도 애써 친구의 가면까지도 포기할 수가 없어서 필사적으로 태연한 척 발버둥을 쳤는데.

널, 좋아해. 멍청아. 그렇게 눈치를 줘도 몰라?

백건은 그 한마디로 지루하고 끈질겼던 8년간의 눈치게임을 끝장냈다. 솔직히 아직까지도 믿겨지지 않는다. 백건이 의심스럽거나 그 말이 못미덥다는게 아니라.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 늘 버리는 법만 배워왔는데, 버리지도 포기하지도 않아도 된다니까. 그게, 너무 꿈만 같아서.

주은찬,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고기 탄다.

제 얼굴을 보며 잠깐 딴 생각에 빠져있던 걸 기막히게 눈치챈 백건이 타박했다. 은찬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그제야 화드득 정신을 차렸다. 허둥지둥 집게로 고기를 뒤집으려는데 벌어진 입 틈새로 잘 싸진 쌈이 갑자기 밀어넣어진다. 왜 이렇게 못먹냐. 집게 줘봐, 내가 구울테니까 좀 먹어. 얌전히 물려진 쌈을 오물오물 씹어 삼키고 나니 갑자기 웃음이 났다. 너 잘 굽지도 못하잖아. 백건은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원래, 도전정신이란 아름다운 거야. 그렇게 기세좋게 말해놓고 본인이 구운 고기를 견디지 못한 건 오히려 백건이었다. 은찬은 한쪽은 덜 익고 다른 쪽은 탄 고기를 백건이 말리는데도 부득불 우겨서 씹어 삼켰다. 맛있었다.

행복한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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