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은찬:전투메이드

은찬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풍경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나, 영화를 보나. 옷짐이 든 단촐한 하드캐리어가 으적대는 이빨에 비닐처럼 우그러지더니 이내 찢어진다. 수건과 속옷, 즐겨입던 니트와 스키니 바지 따위가 그 틈바구니로 삐져나오더니 거칠게 흔드는 고갯짓에 떠밀려 허공에 이리저리 흩날렸다. 백건이 눈에만 띄면 자지러지게 비웃는 코끼리 프린팅의 사각팬티가 청명한 하늘을 가로지르는데 은찬은 수치스러워할 생각도 못했다. 아니,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pc 재질의 단단한 하드캐리어를 종잇장처럼 구길 수 있는 거대한 이빨을 가진 하운드ㅡ일반 개보다 머리가 두 개쯤 더 달려있고 덩치는 오십배쯤 컸지만 어쨌든 비슷하게 생겼다ㅡ와 눈이 마주쳤다면. 은찬은 누렇고 살벌한 이빨에 침이 고여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광경을 멍청하게 바라만 봤다. 피해야 한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잠깐 들긴했는데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선이 뽑힌 키보드의 asdf를 두드리는 기분이었다. 검은 동공과 희번뜩한 흰자위. 각 머리당 두 개씩, 도합 여섯개의 눈동자가 차례차례 은찬에게 향한다. 탐색하는 것처럼 서로 눈이 마주쳤다. 몇 번째 눈이었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지만 아무튼 마주쳤다. 목이 타 저절로 침이 꿀꺽 넘어간다. 심장이 고막 바로 옆에서 쿵쿵 뛰는 것처럼 맥박소리가 거셌다. 은찬은 차라리 눈앞에 선택지가 떴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 도망친다. 2. 싸운다. 3. 설득한다. 사람이 원래 궁지에 몰리면 도피하고 싶은 법이다. 은찬은 필사적으로 현실도피를 시도했지만 그 눈물겨운 시도는 순식간에 휴짓조각이 되었다. 탐색을 먼저 마친 머리 세개의 하운드가 가볍게 목을 흔들더니 다음 순간 달려든 것이다. 순식간에 은찬의 상반신 정도는 가볍게 날려버릴 수 있을 커다란 앞발이 훅 다가왔다.

은찬은 도망치지도 싸우지도 설득하지도 못하고 그냥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다. 억울해서 눈물이 줄줄 날 것 같았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좀 삶에 볕이 든다 싶으니까 종치는 모양이다. 변변찮은 알바나 하며 살면서 청춘을 죽이고 제대로 된 연애 한번도 못해봤는데! 어쩌다가 있는지도 몰랐던 먼 친척이 은찬에게 집을 남겼다길래 이게 웬 떡이냐 달려온게 문제였던 걸까. 아니 평범한 서울 근교 도시에 이런 괴물이 갑자기 출몰할 줄 누가 알았겠어! 시발 시발 개시발...


야.

그렇게 한참 세상과 자신의 불운을 저주하던 은찬은 어깨를 툭 두드리는 손길에 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계집애같은 비명이었지만 쪽팔려할 정신도 없었다. 다시 말해 집나갔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자 쪽팔려 죽고 싶어졌다는 뜻이다. 하필, 눈앞에 있는 것은 예쁘장한 여자애였다. 마니악하게도 메이드복을 차려입은. 이것 역시 2014년에 서울에서 볼 수 있는 현실적인 광경은 아니었다. 괴물 케로베로스의 출몰보다는 덜했지만. 아, 그래 괴물. 괴물은 어떻게 된거지. 그 거대한 앞발이 달려들었는데 왜 아직까지 사지가 멀쩡히 붙어있는지 은찬은 이해가 안갔다. 아니면 벌써 죽어서 천국에 왔나? 메이드복을 입은 천사가 있는? 하지만 저 찡그린 얼굴은 아무리봐도 선함의 대명사인 천사가 할 얼굴이 아닌 것 같은데.

바보냐. 약하면 도망이라도 가든지 멍청하게 서서 뭐하는….

그 때였다. 은찬이 이게 정말 천사의 잔소리인지 고민하다가 문득 메이드 소녀 뒤에서 불쑥 올라오는 검은 그림자에 경악했다. 잠시 잊고 있던 그 괴물이다. 은찬은 비명을 질렀다. 뒤, 뒤에! 손을 덜덜 떨면서 가리켰지만 메이드는 눈썹만 살짝 찡그릴 뿐이었다. 뒤에 뭐? 쌀쌀맞은 대꾸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태평하기 짝이 없다. 그 사이 괴물이 아가리를 쩍 벌리며 덤벼들었다. 제 캐리어를 찢은 저 이빨이 예쁘장한 소녀를 갈기갈기 찢겠지. 대단히 적나라하고 피튀기는 상상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점령했다. 은찬은 소녀를 보호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다행히 몸이 결심을 따라준다. 손을 뻗어 그 애를 뒤로 당겨 숨기려고 했다. 하지만 은찬이 하얀 팔을 잡아당기기 전 소녀가 그 팔을 뒤로 휘둘렀다. 그리고, 그리고. 

은찬은 갈 데 잃은 손으로 눈을 비볐다. 자기가 지금 뭘 본거지. 소녀의 손에는 어느새 길쭉하고 거무튀튀한 봉 하나만이 들려있었다. 저걸로 아마 콧잔등 쯤을 후려쳤던 것 같은데 과장하지 않고 정말 집채만한 몸집의 켈베로스가 그 일격에 그대로 뻗었다. 

온다던 새 주인이 늦길래 마중 겸 나온건데 별 잡종이 다 설치고 있어.

메이드는 이제 혀를 차며 목을 좌우로 꺾고 있었다. 우득, 우드득. 살벌한 소리가 난다. 사실은 어떤 신비한 아티팩트라도 되는게 아닐까 의심스러운 기다란 봉은 그 오른손에, 달랑거리는 슈퍼의 비닐봉지는 왼손에 든 메이드복을 입은 소녀. 쉽게 연결도 안되는 단서들이 뒤죽박죽 머릿속에 곤죽처럼 섞이는 기분을 느끼면서 은찬은 멍청한 목소리로 메이드의 말을 받았다.

새 주인?

그래, 붉은 머리의….

거기까지 툴툴거리며 말을 꺼내던 메이드가 문득 얼굴을 사정없이 구기면서 은찬을 휙 돌아본다. 대단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은찬은 다시 목이 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거대한 개가 으르렁대던 것보다 이제는 이쪽이 훨씬 더 무서웠다.

설마, 니가 주은찬이야? 아니지?

은찬도 그게 자기 이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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