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탁의 지평 합작:The World(역)

삶은 닿지 않을 지평을 향해 끝없이 걷는 과정의 연속이다.


<Glass Notification to Lancelot:/ 미션 결과 및 피해상황 보고하십시오. 랜슬롯.>

아이작은 안경에 뜨는 메세지를 읽으며 가볍게 흐트러진 소매자락을 정리했다. 남색의 수트가 온통 먼지로 얼룩덜룩하다. 마른 핏자국이 지문 사이에 조금 엉겨붙은 손으로 먼지들을 털어내고, 탄실이 완전히 비었을 우산을 접어 정리하면서 아이작은 담담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 타겟 단체 진압 및 저항세력 섬멸 수행 확인. 참여 인원 랜슬롯, 가웨인, 퍼시벌 총 3인 중 중상자 및 사망자 전무. 아, 퍼시벌이 벽에 머리 좀 몇번 박았다고 영 정신 못차리는 것 같긴 한데….
- Oww, 저 완전 멀쩡하거든요, 랜슬롯.

멀린과의 구두 보고에 겁없이 끼어드는 젊은 목소리에 아이작은 픽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 그렇다는데. 곧 복귀할게.
<Glass Notification to Lancelot:/ Confirmed. 3분 내로 헬기 도착합니다. 지점에서 대기요망.>
- Got it.


통신이 꺼졌다. 아이작은 더 이상 메세지가 떠오르지 않는 안경 글래스 너머로 주변을 둘러본다. 수류탄에 터져 반쯤 무너진 시멘트 벽, 천장과 바닥에 온통 잔뜩 남은 탄흔과 시신들. 날뛴 흔적이 퍽 적나라하다. 대부분 새로 들어와 일종의 인턴십 과정중인 새 퍼시벌의 작품이다. 젊은 걸 감안해도 그 친구 좀 과격한 구석이 있다니까. 언젠가 멀린에게 잡담했던 내용을 떠올리며 실없이 웃는 아이작의 시야에 머리를 털며 복도 끝에서 걸어나오는 퍼시벌이 들어왔다. 이마 어디가 찢어졌는지 피딱지가 않아있는 모습에 아이작이 가볍게 혀를 찬다.

- 멀쩡하다며?

- 멀쩡하잖아요.

씩 웃는 얼굴을 보며 못말린다는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젓곤 아이작이 먼저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어지러운 실내를 가로질러 성큼 걸음을 옮기며 풀린 정장 재킷의 단추를 다시 채웠다. 품위는 킹스맨의 중요한 덕목이다. 3분 내로 가야해, 서두르지. Yup. 장난스러운 대답을 귓가로 가볍게 흘러넘기며 이번엔 안경을 조작해 다른 사람에게 메세지를 보낸다.

- 니브, 다친 곳 없지? 3층에 그냥 있어. 올라가면서 합류할게.

돌아온 메세지에 잠깐 걸음을 멈추고 웃는다. Oww. 너무 티내시는 거 아니에요? 퍼시발이 보란듯이 낄낄대며 그를 앞질러갔다. 얄미운 뒤통수를 잠깐 흘겨보고 아이작은 마저 안경 너머로 말을 전송했다.

- 응. 네가 무사해서 나도 기뻐.


*

- 미션 다녀오셨다면서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랜슬롯.

커피를 내려 건네는 익숙한 손을 보며 아이작이 빙그레 웃었다. 드립에 각설탕 두 개, 맞죠? 대답 대신 익숙한 향을 맡고 한 모금 삼키면서 가볍게 눈을 깜빡인다. 그 한 잔에는 일상적인 순간을 새삼스럽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훈김이 흩어지는 그 잠깐 사이에 아이작은 제 안에 퇴적된 시간을 문득 거슬러 더듬는다. 서가의 줄지어 꽂힌 책등들을 손으로 쓸어가며 확인하는 것처럼, 혹은 지난 일기장을 날짜를 거슬러가며 거꾸로 넘겨보는 것처럼.

몇달 전 함께 수행했던 잠입 임무부터 오늘 퍼시벌과 했던 것처럼 그가 지도했던 인턴십, 두 명의 사상자를 냈던 그 기수의 장미의 이름, 다른 킹스맨들과 함께 지켜봤던 다른 일체의 훈련과정들, 눈앞의 킹스맨이 처음 훈련복을 입고 후보생으로 나타났던 순간과 그 이름의 이전 주인이 원탁에 남아있었던 나날들, 그리고 그 이전까지도.

킹스맨의 하루는 짧게 끝나는 일이 좀처럼 없지만 그 긴 하루들이 쌓여 빚는 세월은 어찌나 빠른지. 한때는 선배들의 커피를 눈치를 살펴가며 내렸던 자신이 이제는 후배의 커피를 대접받고 있다는 게. 그 모든 오늘이 과거에 비추면 문득 놀라울 정도로 새삼스러워지는 것이다.

- 오늘도 완벽한데. 늘 고마워, 베디비어.
- 새삼스럽게 별 말씀을 다. 제가 아직도 랜슬롯 커피 취향 하나 못맞추고 있으면 킹스맨 이름 내려놔야죠. 퍼시벌이 분명 나무라셨을, …아.

가벼운 너스레에 아이작은 잠자코 웃었다. 정작 말을 꺼낸 베디비어는 아차싶은 표정이 되었지만. 아이작은 그가 언급하는 '퍼시벌'이 오늘 그와 임무에 동행한 젊고 대담한 킹스맨을 말하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 그 전에 원탁을 지켰던, 좀 더 까다롭고 엄격한 퍼시벌. 그게 젊은 베디비어가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퍼시벌이겠지. 하지만 아이작은 좀 더 이전에 원탁을 지켰던 우아하고 아름다운 또 다른 퍼시벌 역시 기억할 수 있었다. 어디, 그녀 뿐일까. 보호드, 라이오넬, 가레스, 눈앞의 그가 아닌 다른 베디비어와.

- 자네가 올해 몇살이었더라?
- 마흔이죠. 얼마전에 직접 생일축하도 해주셨으면서 기억 안나세요? 

자신이 아닌 랜슬롯까지.

- 랜슬롯?

부르는 이름에 아이작은 잠깐 눈을 깜빡인다. 속눈썹 위에 세월이라도 내려앉은 것처럼 무겁고 느린 움직임이었다. 아직 온기가 남은 커피잔을 전보다는 투박해진 손끝으로 문지른다. 책을 덮는다. 서가를 떠난다. 조금 후에 도로 빙그레 웃었다.

- 아니. 젊다, 싶어서.

아이작은 한때 자신이 그 나이를 아득하게 여겼던 시절을 생각하며 잔을 마저 비웠다. 


다시 찾아온 10월.
아이작은 아담을 비롯해, 묘비에 결코 킹스맨이라 적히지 않을 무덤들앞에 또 한송이의 꽃을 둔다. 이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일 수도 없을 것이다. 아이작은 이해했다.


2015년, 우리는 하나의 지평을 건넜다. 그러나 세계는 하나의 계기를 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지나간 것들이 모두 사라지거나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무덤 위에 남긴 꽃은 시들고 풍화되겠지만, 우리가 건넌 지평들은 지층처럼 쌓이고 나이테처럼 뭉쳐 우리를 정의하고, 다시 우리 자신이 된다.



삶은 닿지 않을 지평을 향해 끝없이 걷는 과정의 연속. 2036년. 아이작 스탠리는 여전히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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